포스터는 영화의 시작과 끝이다. 일찌감치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영화가 끝난 뒤에도 작품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스크린 밖에서 영화를 빛내주는 조연이 바로 포스터다.
박시영(40)은 그 포스터가 전문인 그래픽 디자이너다. 박시영을 모르는 사람도 그가 포스터를 만든 영화는 안다. 필모그래피가 '베테랑'(1341만명), '광해, 왕이 된 남자'(1232만명) 같은 천만 한국 영화부터 '관상'(913만명), '럭키'(697만명), '곡성'(687만명)처럼 그에 버금간 흥행작들, 대중적이진 않아도 눈 밝은 관객들은 알아본 '우리들' 같은 작품들, 올해 아카데미 3관왕 '문라이트'를 비롯한 외국 영화의 한국판 포스터까지 종횡무진이다.
박시영이 2006년에 차린 '빛나는'은 이제 한국의 대표적 포스터 디자인 스튜디오로 자리 잡았다. 올해도 '박열' '살인자의 기억법' 같은 화제작의 포스터가 이곳에서 나왔다. 지난달 27일 찾아간 서울 한남동 작업실에는 간판이 없었고 우편함 명패조차 붙어 있지 않았다. 전에 기타 학원이었다는 실내는 벽 여기저기 벽돌이 드러난 것으로 모자라 그 사이로 홈을 파서 전선을 설치했던 흔적까지 그대로였다.
―포스터가 벽에 잔뜩 붙어 있을 줄 알았다.
"붙이면 봐야 하지 않나. 새 디자인을 하는데 끝난 걸 계속 쳐다볼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지난 작업을 보고 있으면 무엇보다도 부끄럽다. 내가 했지만 진짜 말도 안 된다 싶은 경우도 있다. 실내가 이런 건 인테리어 공사하던 업자가 도망가서 그런 거다(웃음)."
―말도 안 되는 작품이 나오는 건 '고객'의 입김 때문인가.
"전엔 뭘 모르는 사람들이 내 작업을 무시한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10년 넘게 일하고 업계에서 발언권도 생긴 지금은 그런 핑계를 댈 수가 없다. 디자인이 통과될지 안 될지가 바로 보이니까 무모하다 싶으면 시도를 안 하는 거다. 남 탓할 게 없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작품들이 있을 텐데.
"아쉬움이 큰 작품들이 남는다. 풍경을 수묵화처럼 표현한 '고산자, 대동여지도'가 그랬다. 인터넷에서 화제였는데 인터넷 여론이 전부가 아니더라. 많은 사람이 이걸 영화 포스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디자인의 질과 별개로 포스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거다."
―좋은 포스터의 역할이란 게 뭘까.
"관객이 돈을 낼 만하다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한다. 애프터서비스도 중요하다. 누구나 오랫동안 기억나는 영화가 있다.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이 삶을 '이쁘게' 만들어주는데 내가 만든 포스터가 이상해서 좋은 기억을 망치면 안 된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영화나 장르를 좋아하나.
"솔직히 말하면 영화 자주 안 본 지 2~3년 됐다. 전엔 닥치는 대로 봤는데 이젠 영화가 아니라 컷을 하나하나 이어 붙인 걸로 보인다. 주인공한테 감정이입해서 함께 울고 싶은데 '이 장면엔 카메라가 여기쯤 있겠구나' '여기선 붐 마이크를 썼겠구나' 이런 게 보인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그래도 직업상 아예 안 볼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요즘 즐겨 보는 건 마블의 수퍼히어로 시리즈다. CG(컴퓨터 그래픽)가 엄청나게 나와서 그런 분석 자체가 안 되니 재밌다. 최근에 포스터 작업 때문에 본 독립영화 '폭력의 씨앗'은 아주 쇼킹했다. 누구나 내면에 폭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우리는 비겁하게도 그게 통할 법한 상대에게만 폭력이라는 수단을 쓴다는 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았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운 좋은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가스 배달을 했다. 그때 지냈던 홍대 앞은 매일같이 파티, 공연이었고 새 밴드와 새 음반이 매일 나왔다. 디자인 일거리가 넘쳐났다. 그때 작은 영화제 포스터 디자인을 우연히 맡은 게 시작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니 처음엔 손으로 그렸다."
―그 일을 계속한 걸 보면 재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까지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같이 놀면 재밌는 친구'일 뿐이었다. 아무도 내게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포스터를 만들어 처음 칭찬이란 걸 받고 나니 선택지가 생겼다. 가스 아르바이트를 계속 하느냐, 이거(디자인) 하느냐. 돈은 비슷할 것 같았다. 우아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쪽을 택했다."
―'고졸에 비전공'으로 버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정식으로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디자인에는 작품을 평가하는 일반적 기준이 아예 적용이 안 됐다. '나쁘진 않지만 이거 뭔가 이상한데?' 정도의 반응으로 (비판을) 모면해오기도 했을 거다. 책만 보고 혼자 공부한 외국어가 발음이 좀 어색해도 의사소통은 얼추 되는 상황과 비슷하다."
―학력, 경력이 콤플렉스가 되지는 않았나.
"냉정하게 돌아보면 그걸 진짜 잘 팔아먹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비전공이다, 대학 못 나왔다, 그러면 예외적이라는 이미지가 생기니까. 이제는 밑천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밑천?
"또 들먹이기엔 이젠 너무 오래전 얘기니까. 이쯤에서 다음 단계로 가야 할 것 같은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객관적으로 봐야 할 시점이 된 것 같은데 그게 너무 어렵다. 왜 사람들은 나이 든다는 게 이렇게 격렬한 건지 얘길 안 해줬을까."
―변화가 필요한 시점 같다.
"새로운 스튜디오를 상업 영화 포스터 시장에 진입시키는 걸 올해 목표로 삼았다."
―경쟁사를 끌어준다는 말인가.
"이 분야가 산업이 되려면 새로운 사람이 등장하고 디자이너가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스튜디오도 꾸준히 나와야 한다. 그저 영화가 좋아서 하는 일이어선 곤란하다. 개인의 재능으로 돌아가는 분야는 그 개인이 사라지면 그냥 끝이다."
―신진 스튜디오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돕는 것인가.
"다양성 영화 분야의 후배들이 우리 회사 실장을 겸하도록 하고 있다. 자기들 스튜디오 이름을 유지하면서 우리 고객들을 만나고, 일감을 어떻게 얻는지 배우고, 작업 단가도 올리는 거다. 신인일 땐 일 받는 게 그저 감사하지 솔직히 돈 얘길 어떻게 하겠나. 나도 후배들 곁눈질하면서 요즘 트렌드를 접하니 손해날 게 없고."
―이제 새로운 도전은 없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생활 습관을 바꾸는 것으로 매너리즘에서 벗어나려고도 했었다. 이를테면 플라스틱 용기째 먹던 '햇반'을 꼬박꼬박 그릇에 담아서 먹는 거다. 그런데 내게는 결국 일이 훨씬 큰 만족을 준다는 걸 깨달았다."
―일이라면 충분히 해오지 않았나.
"한때 잘나갔던 누군가로 잊히지 않고 영화사에 한 줄 남고 싶다. 지금까지는 영화판에서 인정받고 자리 잡기 위해 일했다. 시대를 뛰어넘는 작품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는 순간 다른 고민이 시작된다. 입 밖에 내지 않아도 누구나 엉뚱한 꿈을 꾸지 않나. 과학자나 우주비행사를 동경하는 어릴 적 꿈일 수도 있고, 영화 속 헐크처럼 돼보고 싶다는 엉뚱한 상상일 수도 있고. 내겐 '이 시대의 클래식'을 만들겠다는 열망이 그런 꿈이다."
박시영
1977 전남 광양 출생
1996 경북 구미고등학교 졸업
2004 제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총괄 아트디렉터
2005 리얼판타스틱영화제 총괄 아트디렉터
2006 '짝패'로 상업 영화 포스터 데뷔
2006~ 디자인스튜디오 '빛나는'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