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감각이 넘치는 서울 마포구 상수동 카페거리에 있는 미용실 '상수동화'. 최신 스타일을 시도하는 미용실이란 게 무색하게 연식 높은 좌식 자개 화장대와 문갑, 장롱이 곳곳에 놓였다.
"손님들이 자개장에서 향수(鄕愁)를 느꼈으면 했어요. 그렇다고 올드해 보이는 건 싫어 어울릴 만한 현대적인 소품을 매치해 봤어요." 자개장 찾아 전국을 다녔다는 장영진(40) 원장이 웃으며 말했다. 미용실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20~30대 여성이다. "어릴 적 할머니, 어머니가 쓰던 자개장의 향수가 떠올라 '반갑다'는 손님부터 '신선하다' '새롭다'는 분도 많아요."
한때는 신부들의 필수 혼수품이었고 '부의 상징'이기도 했던 자개장은 1980년대 이후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아파트가 대량 보급되고 붙박이장이 생기면서 부피 크고 무거운 자개장은 거추장스러운 가구가 됐다. 골동품 취급받으며 사라졌던 자개장이 요즘 트렌드의 중심에 있는 '핫'한 가구로 떠올랐다. 자개장만이 아니다. 외면받다 최근 들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오래된 물건들이 늘고 있다.
이열매(29·서울 상계동)씨는 지난 추석 부산 외할머니 집에서 1980년대 빈티지 컵을 '득템' 해왔다. 오래된 컵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손녀를 보며 외할머니는 혀를 끌끌 찼다. "그거 가져다 어디 쓸라 그라노? 요새 아들 웃긴데이, 뭐 그런 게 다 유행이고." '맥콜' '크라운' 등 추억의 상표가 찍힌 80~90년대 컵들은 요즘 없어서 못 구하는 인기 소품이 됐다.
"어렸을 때 우유 마시던 컵에 대한 추억도 있지만 그것보단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그 시절의 투박하면서도 따뜻한 정서가 느껴져요." 이씨가 빈티지 컵의 매력에 대해 말했다. 부엌 찬장이나 창고에 쌓여 먼지를 뒤집어쓴 옛날 컵과 수십 년 된 접시, 쟁반을 꺼내놓는 사람도 늘고 있다.
'오래된 것'은 낡고 촌스러운 것이라는 한국인의 인식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새 물건에선 찾을 수 없는 시간의 흔적과 향수가 밴 오래된 물건에 눈을 돌리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상'이 쏟아지는 시대, 이제 사람들은 흔해 빠진 새 물건 대신 골동품이 돼버린 오래된 것의 가치를 다시 바라본다.
골동(骨董)의 범위도 바뀌고 있다. 골동의 사전적 정의는 '오래되었거나 희귀한 옛날 기구나 예술품'이지만, 최근 젊은 세대가 향유하는 골동은 훨씬 범주가 넓어졌다. 압축 성장과 현대화에 밀려 사라진 가구·그릇 등 생활용품과 브라운관 TV·필름카메라 같은 아날로그 기계 등 삶의 흔적들을 포함하는 오래된 물건으로 확장됐다. 바야흐로 '신(新)골동'의 시대가 도래했다.
"운 좋게 동네에 자개장 버리신다는 분이 계셔서 그걸 가져다 매장 인테리어에 활용했어요. 요즘 자개장 인테리어가 대세여서 그런지 저희한테 자개장 문의하시는 분들도 생겼어요." 명정우(32)·이수성(35) 부부가 운영하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부부(BUBU)'는 국내외에서 직접 수집한 해외 빈티지 소품을 판매하는 빈티지멀티숍이다. 조명, 액자, 액세서리 등 멋스러운 빈티지 제품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 부부가 직접 리폼했다는 자개 장식장과 장롱이다. 국적과 시대가 다른 물건들이 묘하게 조화를 이룬 공간에서 자개장은 화려한 듯 담백한 포인트다.
골동품 취급받던 자개장이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한때는 촌스럽다 여겨졌던 화려한 광택과 문양의 이 오래된 가구가 젊은 층의 취향을 사로잡고 있다. 대학생 이유정(23)씨는 "자개로 만든 가구들은 요즘 흔히 보는 가구들과 달라 이색적이고 따뜻한 느낌이 들어 좋다"고 했다.
단순히 오래된 것을 꺼내는 게 아니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내 세련된 가구로 활용하는 것이 요즘 트렌드. 서울 구로구 오류동 '호텔 베르누이'는 로비부터 복도, 객실까지 자개장을 색다르게 활용한 가구로 꾸몄다. 화장대, 서랍장, 문갑 등 좌식용 가구는 인터넷에서 구매한 철제 다리를 달아 용도를 바꿨고, 자개 화장대 앞엔 이케아에서 산 작은 원색 의자를 놓았다. 김안나 대표는 "자개장은 원래 외국인 손님들이 선호했는데 최근에는 20~30대 여성이나 가족 단위의 내국인 손님들에게도 인기"라고 말했다.
자개장뿐만 아니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남성복 전문매장 '프루이'에선 인쇄소에서 쓰던 도면함을 넥타이 진열장으로 활용했다. 층층이 색색의 넥타이가 진열된 도면함은 원래부터 넥타이 진열장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멋스럽다. 나승윤 대표는 "원래 보기 드문 물건이라 그런지 넥타이보다 손님들이 가구에 관심을 더 가질 때도 있어 사실 난감하기도 하다"며 웃었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 '표준커피'에선 낡은 목재 도면함이 책장으로 변신했다. 삐걱거리는 서랍장을 열 때마다 숨어있는 책을 발견하는 색다른 재미가 있다. 도면함 상판엔 손님들을 위한 방명록과 이케아 스탠드, 복고풍 디자인의 브리츠 오디오가 놓여 있다. "오래된 물건이 주는 자연스러운 묵직함이 있어요. 요즘 인테리어와도 뜻밖에 잘 어울리고요." 조규영(41) 대표의 말이다. 낡은 도면함을 인테리어에 활용하는 곳이 늘면서 골동품 취급받던 이 가구는 지위가 격상됐다. 1~2년 전까지도 버려지던 것이 최근엔 40만원까지 가격이 치솟았단다.
디지털의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아날로그의 기억은 더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우연히 발견하는 아날로그 가전제품이 더 반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아담한 타르트 가게 '오늘의 위로'엔 특별한 텔레비전이 있다. 1980년대 추억의 만화 '빨간머리 앤'이 흘러나오는 브라운관 텔레비전은 '골드스타(Goldstar)'라는 상표가 붙은 로터리식이다.
서슬기(34) 대표는 "'빨간머리 앤'을 좋아해 언젠가 가게를 열게 되면 틀고 싶었다"며 "아날로그 텔레비전이 이 만화 느낌에 가장 어울릴 것 같았는데 손님들 반응이 이렇게 좋을 줄 몰랐다"고 했다. 사람들은 타르트보다 텔레비전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직장인 최진영(29)씨는 "이렇게 오래된 텔레비전이 틀어져 있는 건 거의 본 적이 없다"며 "추억 속 만화와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니 묘하게 위로받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아날로그 텔레비전을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늘었다. 서울 중구 황학동에서 40년 가까이 텔레비전을 전문 취급했다는 '정은TV' 신정택(63) 대표는 "4~5년 전부터 아날로그 텔레비전을 찾으러 오는 손님이 많아졌는데 20~30대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 카페 '우아하게'엔 요즘 구하기도 힘들다는 옛날 우유 냉장고가 놓여 있다. 보는 사람마다 '우와' 하며 신기해하고 반가워하는 이 키 낮은 우유 냉장고는 이제는 사라진 골목 수퍼마켓이나 동네 목욕탕을 떠올리게 한다. 우유 냉장고엔 우유 대신 치즈케이크와 맥주, 과일청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게엔 오래된 전축, 바둑판으로 만든 테이블, 저울로 만든 화분 받침 등 80~90년대 동네 어딘가에서 볼 법한 소품들이 가득하다. 망원동의 옛 풍경을 간직한 공간에선 시간도 천천히 가는 느낌이다.
불편함을 감수하며 카세트테이프로 아날로그 음악을 듣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해 10월 개설된 네이버 카페 '카세트테이프를 듣는 사람들(cafe.naver.com/analoguser)' 회원들 얘기다. 디지털 음원으로 음악을 듣는 시대지만 이들은 80~90년대 카세트테이프를 수집하고 오래된 '워크맨'을 수리해 음악을 듣는다. 운영자 '비로새긴낙서'(닉네임)는 "30년 넘은 카세트 플레이어도 수리만 하면 깨끗한 소리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며 "조그만 사각형 안에서 두 개의 축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내는 소리엔 디지털로는 느낄 수 없는 인간미가 흐른다"고 했다. 30~40대가 대부분이었던 카페엔 10~20대 회원도 크게 늘었다.
이처럼 디지털 대신 아날로그의 추억을 느끼려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관련 제품 판매도 늘고 있다. 지난 18일 옥션에 따르면 수동카메라 판매율은 전년 대비 136%, 즉석카메라는 15% 증가했다. 옥션 리빙레저실 이진영 실장은 "디지털에 염증 느끼는 이가 늘면서 시간은 좀 걸리지만 과정을 직접 손으로 경험하는 아날로그 제품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고 했다.
'신(新)골동'을 소비하며 열광하는 주체는 실제 그 시대를 살며 물건을 사용했던 기성세대가 아니라 젊은 층이다. 시기적으론 보통 골동하면 떠오르는 시기인 1900년대 초중반 이전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가까운 과거인 80~90년대 물건이다.
'신골동'을 바라보는 시선은 세대별로 다르다.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을 경험한 1020세대에게는 경험해보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단순히 오래된 것보다 현대적인 재해석이 더해져 있어 접근하기 쉬운 감각적인 코드도 읽힌다. 서울대 소비자학과 전미영 교수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겐 복고나 오래된 것이 그 자체로 신선한 새 문화"라고 말했다.
반면 80~9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3040세대에겐 강력한 향수의 매개체다.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다니엘 레티히는 저서 '추억에 관한 모든 것'에서 "향수는 그만큼 강력하다. 우리는 입증된 것과 알고 있는 것에 기대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에게 이미 알고 있는 상표와 제품은 신뢰와 안정감, 방향성을 제공하는데, 그것들이 감정 또는 아름다운 기억과 연결되어 있으면 특히 더 그렇다"고 했다.
경제력을 겸비한 3040세대의 경우 어릴 적 경험했지만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들을 소비하며 직접적으로 향수를 달래기도 한다. 카세트 마니아인 40대 신지훈씨는 "어릴 적 워크맨이 너무 비싸 그저 선망의 대상이었다"며 "돈을 벌면서 당시엔 엄두 내지 못했던 카세트 플레이어를 모으면서 마니아가 됐다"고 했다.
이들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선은 반신반의다. 주부 정희순(58)씨는 "우리한텐 평범한 물건인데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기특하기도 하다"면서 "그래도 유행이라는 게 금세 바뀌니 '반짝' 유행하다 다시 새로운 걸 찾지 않겠느냐"고 했다.
왜 사람들은 지금 오래된 물건과 과거를 다시 돌아보는 걸까? '추억 속의 한국사회'를 쓴 연세대 사회학과 김왕배 교수는 "과거를 되돌아본다는 것은 앞만 보고 달려온 산업화에 대한 자기 점검의 한 전력"이라며 "향수는 과학기술과 시장의 성장, 미래의 진보를 둘러싼 맹목적 믿음에 대한 자기 성찰이기도 하다"고 했다.
지금 사람들이 추구하는 건 그저 과거에 얽매인 과거 지향적 향수는 아니다. 오래된 것을 단순히 모아놓는 게 다가 아니라 새로운 감각과 해석을 덧대 현재로 소비한다. 오래된 골동과 신골동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