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조각의 개척자 김복진(1901~1940)은 1920년대 후반 경성 거리에서 마주친 몇몇 여성들 뒤를 캐다가 "여러 번 봉변을 당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창작을 위한 여성 누드모델을 구할 방도가 없자 '거리 헌팅'을 시도한 것인데 치한으로 오해받은 것이다. 김복진은 한때 색주가(色酒家)의 작부를 모델로 고용한 적도 있고, 남의 집 식모, 유모 같은 여성들에게 모델이 돼 달라고 설득한 일도 있었다.

한국 최초의 누드화로 꼽히는 김관호의‘해 질 녘’(왼쪽·1916년 작)과 검정치마 흰 저고리 차림의 미술대학 여학생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옛 누드 모델.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으로 추정된다(경향신문 1975년 8월 14일 자).

100여 년 전 우리의 서양미술사 초기부터 누드화가 창작됐으나, 작가들에게 누드모델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나체화 자체를 망측한 것으로 여겼으니 누구에게 "옷 벗고 모델 좀 돼 달라"고 잘못 말했다가는 뺨 맞기에 딱 알맞았다. 국내 최초의 누드화로 꼽히는 김관호의 1916년 작 '해 질 녘'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건 작가가 동경미술학교 재학 시절 일본에서 모델을 구해 그렸기 때문이었다. 작가는 젊은 날 고향 냇가에서 우연히 훔쳐봤던 동네 여인의 목욕 장면이 그림의 기초가 됐다고 했다. 초창기 한국 미술 개척자들은 '누드모델 구인난' 탓에 온갖 방법을 다 썼다. 일제 강점기엔 권번(券番·기생조합)에 요청해 기생들을 화폭 앞에 세웠다. 1950년대의 어느 작가는 대중목욕탕의 불 때는 할아버지에게 돈을 쥐여줘 가며 구멍을 통해 훔쳐본 여탕의 기억을 되살려 캔버스를 메웠다.

1955년 신문에는 여성 누드모델의 인터뷰가 실렸다. 모 대학 미술학부에서 옷 벗은 채 포즈를 잡고 있던 여성은 '6·25사변으로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게 되어' 이 일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다른 천한 직업으로 윤락하기보다 차라리 깨끗하고 보람 있지 않으냐"는 말도 했다. 당시 여성이 누드모델이 되려면 어떤 마음의 각오를 해야 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동아일보 1955년 10월 9일 자).

김흥수(1919~2014) 화백은 19세 때 나체 모델을 처음 보고 '실신할 정도로 감동'을 받은 이후 누드를 중요한 창작 영역으로 삼았다. 그의 누드화 '나부군상(裸婦群像)'이 1949년 제1회 국전에 입선됐으나 주최 측인 문교부는 작품을 전시장에서 철거했다. 다른 누드화들은 그냥 두면서 '나부군상'만 치웠다. 기자가 그 이유를 따져 묻자 장관은 "모델을 한 사람 놓고 그렸다면 몰라도 그렇게 많은 여성을 (한꺼번에) 벗겨 놓고 그림을 그린 작가의 정신이 문제"라고 답했다. 어이가 없어진 기자가 "군상이라도 모델은 한 사람씩 써서 그리는 것"이라고 설명하자 장관 얼굴이 새빨개졌다.

익명의 그늘에 있던 누드모델들은 1990년대 후반부터 세상에 얼굴을 드러냈다. 1996년 누드모델협회가 생겼다. '누드모델 ○○○'이란 명함을 만든 모델도 나왔다. '노출'에 관한 의식은 경천동지할 만큼 바뀌어 갔다. 예술을 위해 작가 앞에서 벗는 일을 정조라도 파는 것처럼 끔찍하게 여겼던 시절은 까마득한 전설이 됐다. 몇 년 전엔 20대 전문직 여성들이 '투잡'으로 누드모델을 택해 자신들의 알몸 사진을 대중에 선보이기도 했다. 너도나도 서슴없이 벗는 시대는 누드모델들에게 더 편한 세상일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영국 미술사가 케네스 클라크의 구분대로 나체(the naked)와 다른, '교양을 동반하는 사유의 결과물'인 진정한 누드(the nude)로서의 차별성을 더 분명히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