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인 1917년 10월 15일은 ‘세기의 여간첩’이자 매혹적인 이중 스파이의 대명사로 알려진 ‘마타하리’가 처형된 날이었다. 10년 전, 유럽 각국의 수도를 돌며 ‘이국적인 춤사위’로 각국 고관대작들의 애간장을 녹였던 마타하리는 이날 파리의 생 나자르 교도소를 나섰고 총살됐다. BBC가 그의 굴곡진 삶을 되짚었다.

팜므 파탈 스파이로 불리는 마타하리

이국적인 무희(舞姬)에서 제1차 대전 기간엔 양(兩) 진영을 오가는 이중 스파이로의 삶. 인도네시아어로 ‘태양’을 뜻하는 ‘마타 하리’는 이름에 걸맞게 세상을 풍미했지만, 동시에 세계 첩보전쟁의 희생양이었다.

그는 프랑스 샹젤리제의 한 호텔에서 체포된 후 1차 대전으로 갈등의 양극에 있는 독일과 프랑스 사이를 넘나든 이중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처형될 때마저 눈가리개를 거부하고 자신의 변호사에게 한 손을 가볍게 흔들어 작별하며 ‘팜므 파탈’의 모습으로 사라졌다.

그의 본명은 마가레타 거트루이다 젤러(Margaretha Geertruida Zelle)로,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에서 불행한 결혼 생활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혼한 뒤, 프랑스로 건너와 물랭루주 극장에서 뇌쇄적인 무희로 이름을 날렸다. 이를 계기로 유럽 사회의 중심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된 프라이즈(Fries) 박물관의 한스 그로인웨그 관장은 “그가 지난 세기 초반 유럽의 중심에서 이룬 업적들을 생각하면, 스파이가 아니었더라도 기억됐을 거다. 그는 스트립쇼를 안무의 형식으로 고안했고, 유럽 사교계의 명사였다”고 평가했다.

이국적인 댄스로 유럽 사교계의 중심에 서면서, 그는 각국 정부 관리까지 상대하는 위치에 올랐다. 1차 대전의 짙은 전운(戰雲) 속에서 마타하리는 각국 정보당국이 탐낼만한 스파이였다. 마타하리는 프랑스의 스파이로,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사귄 독일 육군 무관인 아놀드 폰 칼레를 유혹해 독일의 기밀(機密)을 빼내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 프랑스 첩보 당국은 칼레가 독일 본국에 보내는 암호 전문(電文)을 해독해서, 칼레가 전문에서 ‘H21’이라는 암호명으로 부른 한 스파이와 그의 인맥, 심지어 그의 측근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H21’은 마타하리였고, 마타하리는 독일의 ‘이중 스파이’이었다는 것이다.

처형장의 마타 하리

프랑스 첩보당국에 체포된 마타하리는 신문 과정에서 독일 첩보당국으로부터 ‘이중 스파이’ 제안을 받았지만 “돈만 받고 도주할 생각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프랑스 법원은 마타하리가 프랑스군 5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정보를 독일 측에 넘겼다고 판단했고,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독일 첩보당국은 해외 암호 전문을 이미 프랑스가 해독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칼레는 왜 ‘읽힐 것이 뻔한’ 암호 전문에서 마타하리의 암호명 H21을 거론했을까. 독일은 이중스파이를 처단하기 위해서, 프랑스는 자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전세(戰勢)의 탓을 돌릴 희생양이 필요했다. 사형은 신속하게 집행됐다.

체포 당시 마타하리

화려했던 삶의 마무리는 쓸쓸했다. 처형된 시신은 아무도 수습하지 않아, 해부용 시신으로 쓰였다. 마타하라의 머리는 해부 박물관에 보존됐지만, 20년 전쯤 박물관 소장품 조사 결과, 사라진 것이 확인됐다. 도둑맞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마타하리의 스파이 활동과 처형은 이후 학계의 재조명을 받았다. 많은 역사학자는 그가 전쟁의 명분을 위해 희생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페미니스트들은 그가 ‘무희(舞姬)’라는 당시의 낮은 도덕적 지위로 인해, 쉽사리 ‘프랑스의 적(敵)’으로 내몰리는 희생양이 됐다고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