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아내, 배은망덕한 형제, 무심한 남편…. 별별다방 온라인 게시판에서 한바탕 댓글 뭇매를 맞는 분들이 계십니다. 세상에 어쩌면 저런 몹쓸 사람이 있느냐고, 손님들은 왁자하게 들고일어납니다. 하지만 저는 그 행간에 숨죽이고 있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열을 내며 그들을 손가락질하는 까닭은, 그들의 얼굴이 낯익기 때문입니다. 내 가족이거나, 혹은 나 자신의 감춰진 모습이기도 하기에….

홍여사 드림

일러스트= 안병현

근력이 예전 같지 않아서, 젊은이들 눈치가 보여서, 이젠 함께할 사람도 없어서…. 나이가 들어가며 예전에 즐기던 것들을 하나하나 떠나보내는 느낌입니다. 그나마 매일 아침 신문을 읽는 일이 저에게 남아 있는 낙인 셈인데, 평소 즐겨 읽던 별별다방에서 며칠 전 뼈아픈 사연을 보게 되었습니다.

암 투병 중에도 차례상을 차리게 생겼다는 어느 부인의 이야기 말입니다. 아내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기 조상님 모시는 일에만 치중하는 그 댁의 남편은 독자들로부터 큰 원성을 샀지 싶습니다. 저 역시 그 무심함에 혀를 내둘렀지요. 하지만 차마 비난의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그 남편보다 나을 것이 없는, 오십보백보의 죄인이니까요.

제 아내는 스물세 살의 나이에 저에게 시집와서 50년 가까이 종처럼 살다가 3년 전에 세상을 떴습니다. 제가 맏이다 보니 아내는 식구 많은 집에 첫째 며느리로 와서 큰 일꾼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아직 쉰 살밖에 안 되었던 어머니는 어린 며느리에게 살림을 맡기시고 타박만 하셨고, 시아버지는 헛기침과 호통으로 없는 위신을 세우려고 하셨지요. 뜬구름 잡는 시동생은 수시로 돈 사고를 치며 집안을 뒤집어 놓았고, 철없는 여동생들은 행주 한 번, 빗자루 한 번 쥐는 일 없이 올케를 부려 먹었고요.

돈 버는 사람은 제가 유일했는데, 그 월급봉투는 아내가 아닌 어머니 손에 들어갔기에 아내는 번번이 푼돈을 타서 반찬거리도 사고 아이 내복도 사고 했지요.

어머니는 아들이 벌어온 돈으로 딸들 블라우스며 화장품은 잘도 사주면서 며느리는 시집올 때 해온 속옷을 닳고 해지도록 입게 놔두셨습니다. 지금 같으면 누가 그러고 살까요? 그러나 그때는 그걸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이웃에도 그런 며느리들이 있었고, 그런 시어머니 그런 무심한 남편들이 널려 있었으니까요.

어쩌면 아내는 주눅이 들어 더 아무 말 못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남에게 시집와서 아들을 낳지 못했으니, 한 집안 대를 누가 잇고 부모님 제사는 누가 모시느냐며 한숨을 쉬곤 했지요. 지금 같으면 제가 아내를 나무라며 위로하겠습니다. 기필코 대를 이어야 할 만큼 뭐 그리 대단한 집안도 아닐뿐더러 요즘 세상에 무슨 제삿밥이냐고요. 그러나 그 당시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스스로를 죄인 취급하면 저는 그 곁에서 고개를 주억거렸지요. 맏며느리로서 네 죄를 네가 아는 듯하니 몸으로 봉사해서 그 죄를 갚으라는 듯이 말입니다. 구식에다 완고했던 시부모님에 얄밉도록 무심한 남편. 그 밑에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 셋을 소리도 못 내게 쥐어박으며 키워야 했던 아내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세월이 흐르며 우리 집안 풍경도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습니다. 아내의 등골을 빼던 동생들은 하나하나 시집 장가를 갔고 부모님도 세상을 뜨셨지요. 아내가 눈물과 설움으로 키운 세 딸은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재원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뿐인가요? 아들 못지않은 사위 셋이 집안에 들어와서 어머님 아버님 불러대니, 아들에 대한 우리 내외의 목마름을 촉촉이 적시고도 넘쳤습니다.

제 환갑 때이던가 아니면 아내의 환갑 때이던가, 저희 내외는 그런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살다 보니 이런 좋은 날을 만난다고요. 우리는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며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몸을 잘 챙겨서 남은 날을 재미나게 살다 가자고요.

그러나 지금 저는 그 맹세의 말을 비통한 심정으로 돌아봅니다. 저는 약속을 지켰는데 아내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 몸을 금쪽같이 아끼며 운동과 영양 섭취에 신경을 썼는데 아내는 자기 몸을 여전히 무쇠 덩어리같이 취급했습니다.

다 키운 줄 알았던 세 딸 뒷바라지가 아직 태산처럼 남아 있더군요. 산후조리에, 육아에, 김장과 반찬 조달까지. 잘난 딸들의 직장 생활을 보필하려니 아내의 몸이 남아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같으면 제가 두 팔 걷어붙이고 거들기라도 하겠는데, 그때는 또 그런 생각이 안 났죠. 등산 다니고 친구 만나 술 마시고, 제 생활에 바빠서 아내는 뒷전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잘난 '제사'가 아내의 발목을 오래오래 붙잡았습니다. 아내에게 뭐 그리 살갑게 해준 시부모라고, 아내는 혼자서 열심히 제사상을 차렸습니다. 아들을 못 낳았으니 상차림을 거들어줄 자식 내외도 없고, 혼자 일하는 게 당연하다며 끙끙대고 일하던 모습…. 저는 그 모습을 구경만 했습니다. 물론 말로는 힘든데 어지간히 하라고 했죠. 동생들은 골프에 해외여행 간다는데, 양도 반으로 줄여라, 올해는 건너뛰어라…. 하지만 그 말에 진심은 담지 않았습니다. 넉넉한 차례상이 없는 명절은 생각해본 적이 없고 아내의 일을 거들 생각도 없었지요.

아내는 혼자서 그렇게 마지막까지 며느리로 살다가 세상을 떴습니다. 일을 당하고서야 저는 알았지요. 아내의 건강이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요. 죽을 힘을 다해 전을 부치고 탕국을 끓였다는 것을요. 힘들면 말을 하겠지…. 그런 생각으로 저는 평생을 무심했던 겁니다.

무심했던 남편 곁을 아내는 참으로 무정하게 떠나갔습니다. 아무 불평 없이 한결같던 사람이라 그 빈 자리가 더 큽니다. 명절 같은 때면 허전해서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아내가 떠난 뒤로, 그깟 제사 없애버릴까 하다가 마음을 바꿨습니다. 나도 그 고생이 뭔지 알 의무가 있기에 내가 건강한 동안에는 상을 차리자고요. 아무것도 할 줄 몰라 시장에서 이것저것 사다가 늘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혼자 선 저는 아내를 그리며 아내의 명복을 빕니다. 조상님 명복은 그만큼 빌었으면 충분하니까요.

제가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상을 차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내의 50년 수고를 백분지 일이라도 느끼고 가야 저승에서 아내를 힘껏 끌어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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