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개발에는 10~15년 이상 걸리고 후보 물질 중 상업적으로 성공할 확률은 1%에 불과하다는 제약 업계의 오랜 공식이 깨지고 있다. 신약 개발 전략이 ‘빠른 의사결정(Quick win, fast fail)’으로 바뀌면서 인공지능(AI) 활용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
글로벌 제약사 화이자와 테바는 클라우드 기반 AI 플랫폼인 IBM의 ‘왓슨’을 신약 개발에 활용하고 있고, 얀센은 영국 AI 기업 베네볼런트AI(BenevolentAI)와 손잡고 난치성 질환을 타깃으로 하는 신약 개발에 착수했다.
배영우 아이메디신 대표(한국제약바이오협회 4차산업 전문위원·사진)는 20일 한국제약바이오협회가 발간한 정책보고서에서 이같은 내용이 담긴 '4차 산업혁명시대 AI를 활용한 신약 개발 트렌드'를 소개했다.
배 대표는 “신약 연구개발(R&D) 분야는 실패 위험이 높고 오랜 개발 기간과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초기 R&D에서의 효율성과 효과성이 제약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AI를 활용하면 기존의 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연구 방식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며 “AI를 통해 방대한 데이터를 취합하고 분석함으로써 임상시험을 최적화시키고 부작용이나 작용 기전을 예측하고 분석하는 등 신약 개발에서 필요한 과정을 단축시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글로벌 제약업계의 신약을 위한 R&D 투자 규모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미국 제약시장 분석기관 ‘이밸류에이트 파마’에 따르면 신약 R&D 비용은 2015년 1498억달러에서 연 평균 2.8% 증가해 오는 2022년 1820억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신약 허가 건당 연구개발 비용은 평균 24억달러에 달한다.
신약 개발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시장으로 연계되는 확률도 저조한 것이 특징이다. 최근에는 신약개발에 대한 실패 위험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배 대표는 “신약 개발의 사례를 살펴보면 5000여개 이상의 신약 후보물질 중에서 단지 5개만이 임상에 진입하고, 그 중에서 하나의 신약만이 최종적으로 판매 허가를 받는 것이 현재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위해 소요되는 임상 기간도 1990~94년 동안 평균 4.6년에서 2005~09년 동안은 7.1년으로 늘어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배 대표는 이런 흐름 속에서 글로벌 빅파마(대형 제약사)들이 AI를 이용한 신약 개발에 착수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환자의 건강 데이터를 기반으로 효과성과 효율성을 높여 성공률과 수익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AI가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얀센은 베네볼런트AI와 제휴계약을 체결하고 인공지능을 적용해 임상 단계 후보물질에 대한 평가 및 난치성 질환 타깃 신약 개발에 착수했다. 화이자는 IBM의 ‘신약 탐색용 왓슨(Watson for Drug Discovery)’을 도입해 면역 종양학 분야에 적용하고 항암 신약 연구 개발에 착수했다. 화이자는 자사가 보유한 암과 관련된 대규모의 자료를 학습하고 분석하는 데 왓슨을 사용하고, 특히 신약에 적용될 표적을 발굴하기 위한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배 대표는 “신약 탐색용 왓슨은 방대한 정보로 복잡한 암 치료 영역에서 신약과 병용요법 개발을 효과적으로 돕고 환자들에게 보다 신속히 ‘혁신적인 신약(first-in-class)’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 이스라엘 제약사 테바도 IBM과 제휴해 호흡기 및 중추 신경제 질환과 만성질환 약물 복용 후 분석을 통해 신약 개발에 착수했다. 테바의 의약품을 복용하는 환자 중 약 2억명 상당의 복용 후 데이터를 모아 부작용 사례, 추가 적응증 확보 및 신약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독일 제약사 머크는 AI 기업 ‘아톰와이즈(atomwise)’와 제휴를 맺었는데, 아톰와이즈는 AI 기술로 하루 만에 에볼라에 효과가 있는 신약 후보물질을 2개나 발견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배 대표는 AI 활용으로 신약 개발의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전망하면서 수요자 중심의 인력 양성과 국내 제약산업 실정에 맞는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혁신 신약 개발을 위한 생태계 조기 조성 및 국내 제약업계의 신약 탐색 분야에서의 인적, 시간적, 재정적 장벽을 짧은 시간에 극복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 상용화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AI 플랫폼을 활용해 국내 제약사들이 공용으로 AI를 사용할 수 있는 인프라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국내 제약사가 단독으로 AI 플랫폼을 도입하기에는 기업의 규모 측면에서 여력이 안되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면서 “신약 탐색분야에서 국내 기술력으로 독자적인 AI 플랫폼과 서비스가 등장하는데는 짧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신약 개발에 필요한 데이터는 공통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대한 공공 데이터를 중심으로 AI 플랫폼에 학습해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국가와 민간이 공동으로 투자하고 운영하는 인프라가 필요하다”며 “이를 위한 국가적 장려와 빅데이터 활용을 포함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투자는 제약산업의 발전을 가속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