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기 무렵 금관국(김해) 중심으로 형성됐다는 '전기(前期) 가야'는 실체가 없다. 가야연맹은 4세기 이후 급부상한 대가야(고령) 주도로 경상도 내륙 세력이 통합되고 확장하면서 만들어졌다."

'가야문화권 조사·연구 및 정비'가 새 정부 100대 국정 과제에 포함되면서 가야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중진 역사학자인 주보돈(64) 경북대 교수가 '가야는 연맹체, 전기 가야는 금관가야 중심, 후기 가야는 대가야 중심'이라는 통설을 부정하고 대가야를 중심으로 가야사를 이해하는 새로운 학설을 내놓았다. 주 교수는 한국고대사학회와 목간학회 회장, 국사편찬위원, 문화재위원 등을 지낸 한국고대사학계의 저명 학자이다.

경상북도 고령군 지산동 주산 능선을 따라 대가야 왕과 왕족들의 무덤 200여 기가 펼쳐져 있다.

주보돈 교수는 최근 출간한 저서 '가야사 새로 읽기'(주류성)에서 "금관국의 전신인 구야국 등 12개의 읍락(邑落)국가로 이루어진 연맹체는 가야가 아니라 가야사의 전사(前史)인 변한(弁韓)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 교수에 따르면, 구야국은 낙동강 어귀에 자리 잡은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서 한(漢)군현의 선진 문물 수용, 철(鐵) 무역 등을 주도하면서 변한을 이끌었지만 4세기 들어 낙랑·대방군의 소멸과 금은(金銀)의 부상 등 변화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쇠퇴의 길에 들어섰다. 반면 경상도 내륙에 자리 잡았던 대가야는 낙랑·대방의 유이민을 받아들이고 철과 금·은 생산·유통에 적극적이었으며 마침 낙동강 진출을 시도한 백제의 후원을 받으면서 가야연맹 형성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으로 낙동강 동쪽이 신라의 영토가 되면서 물류 창구 역할이 중단돼 어려움에 봉착했던 대가야는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해 새 통로를 확보함으로써 이를 극복했고 중국 남제(南齊)와 직접 교류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주 교수는 대가야가 가야연맹의 맹주가 된 시기를 이제까지 정설이던 5세기 중반에서 1세기 이상 끌어올렸다. 400년 광개토대왕 남정으로 금관국이 타격받으면서 전기 가야가 붕괴됐다는 통설도 부인한다. 4세기 전반에 이미 대가야 주도로 가야연맹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대가야는 그 후 백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면서도 때로 신라와 백제 사이를 줄타기하며 영역 확장을 모색했다고 주장한다. 남강 상류, 금강 상류, 섬진강 유역, 남해안 일대 고분에서 속속 발견되고 있는 대가야 양식 토기 등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가야사 복원의 방향을 놓고 정부 부처 간에도 의견이 엇갈리고 영남과 호남 동부의 관련 시·군들이 협력과 경쟁을 이어가는 가운데 나온 주보돈 교수의 저서는 미묘한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제까지 가야의 중심으로 알려져 복원 사업을 주도해온 김해의 반응이 주목된다. 박대재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대가야를 시종일관 가야사의 중심에 놓는 주보돈 교수의 주장은 학계에서는 아직 소수설(說)이며 검증하고 토론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