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서울 관악구 인헌동 관악산 기슭에 자리 잡은 한 아파트 거실이 진료실로 변했다. 4년째 퇴행성 뇌 질환인 파킨슨병과 당뇨병을 앓는 이모(80)씨는 걷지를 못해 종일 휠체어에 의지해 지낸다. 병원 한번 가려면 남편과 딸 등 온 가족이 동원돼 '외출 전쟁'을 치러야 한다. 이날은 의료진이 환자 집을 직접 찾아와 이씨 집에서 진료가 이뤄진 것이다. 서울성모병원 '가정 주치의'와 '가정 간호팀'이다.
◇환자 집 찾아가는 가정 주치의 도입
가정의학과 이글라라 교수가 청진기로 숨소리를 체크하고 신경운동기능을 살펴봤다. 파킨슨병 환자는 음식을 잘 삼키지 못해 사레가 쉽게 걸린다. 그러다 물이나 음식이 폐로 들어가 폐렴에 걸리기 쉽다. 이 교수는 "거친 숨소리나 쌕쌕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폐렴은 없는 것 같다"면서 "다만 혈당 조절이 잘 안 되니 기존 당뇨병 약을 바꿔 새로 처방전을 만들어 놓을 테니 가족이 와서 받아가시라"고 했다. 이와 함께 가정 간호사 김정순씨는 한 달에 한 번씩 들러 혈압·맥박·체온 생체지표와 혈액과 소변 검사를 한다.
서울성모병원은 의사가 환자 집을 방문하는 가정 주치의제를 지난 2월 시작했다. 국내 병원서 가정 방문 주치의가 본격적으로 꾸려진 첫 사례다. 지금까지 400여 환자가 대상자로 등록해 가정 주치의의 방문 진료를 받았다.
이 병원 가정 간호 전담 간호사 50여 명은 매주 1100여 번 가정 방문을 하며, 서울과 경기도 일대 2300여 명의 환자 가정을 돌본다. 가정 간호사가 의사 처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가정 주치의에게 의뢰해 방문 진료를 하는 식이다. 현재는 의사가 환자 집으로 왕진 갈 경우 일반 진료비와 교통비만 건강보험 수가로 책정돼 있다. 의사 근무시간당 수익 면에서는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만 보는 게 훨씬 낫고, 왕진을 갈수록 손해다. 이에 방문 진료를 활성화하려면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령 환자가 많은 일본은 '노인 환자 왕진 의사제도'를 운영하면서 건강보험에서 이를 지원해 재택 의료를 활성화하고 있다. 스페인 공립병원은 노년내과에서 지역사회 거동 불편 노인 환자를 대상으로 가정 순회 진료를 실시하고 있다.
◇집에서 임종 맞는 가정 호스피스
지난달 국립암센터 호스피스 완화의료실 간호사와 의사가 '가정형 호스피스' 스티커가 붙은 소형 차량을 타고 이 지역에 사는 췌장암 말기 환자 김모(85) 할머니 집을 찾았다. 환자는 임종기에 접어들어 호스피스 의료진은 거의 격일로 방문하고 있다. 환자의 집 거실에는 해바라기를 비롯한 화분 10여 개가 창가에 모여 있었다. 김씨는 평소에 쓰던 안방 침구에서 누워 있다. 앙상한 체구지만, 얼굴은 평화롭고 맑아 보였다. 의료진은 혈압과 맥박을 재고, 음식 토하는 것을 방지하는 주사제와 진통제를 놓았다.
환자는 지난 3월 췌장암 전이 상태로 말기 암 진단을 받았고, 이에 환자와 가족은 살던 집에서 죽음을 맞는 가정 호스피스를 신청해 지금까지 돌봄을 받았다. 이처럼 집에서 임종을 맞는 가정 호스피스가 도입돼 조금씩 확산되고 있다. 지난 8월부터 전국 25개 의료 기관에서 시범 사업이 이뤄지고 있다. 대상은 ▲말기 암 ▲만성 폐쇄성 호흡기 질환 ▲만성 간경화 환자 ▲중증 후유증을 앓는 에이즈 환자 등이다. 서울대 의대 윤영호 교수는 "객지와 같은 병원보다 자기가 살던 집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면서 "말기 상태에서 입원해서 호스피스를 받건 집에서 받건 건강보험에서 호스피스 진료비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가정 호스피스가 활성화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