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9명 규모의 소형로펌 법무법인 다산이 삼성전자(현 삼성디스플레이) LCD 근로자 산업재해 인정 소송 상고심에서 1, 2심을 뒤집는데 성공했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지난달 29일 삼성전자 LCD사업부 천안사업장에서 생산직으로 일한 이모(33)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불승인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1, 2심을 깨고 파기환송했다. 대법원이 삼성전자 LCD공장 근로자의 희귀질환인 다발성경화증을 산업재해로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로 서울고법으로 사건을 돌려보낸 것이다. 대법원이 다발성경화증에 대해 산재를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발성경화증은 뇌, 척수, 시신경을 포함하는 중추신경계에 발생하는 만성 신경면역계 질환으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희귀질환이다. 한국 사람 10만명당 3.5명에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2002년 11월 삼성전자에 입사해 LCD사업부 천안사업장에서 패널 화질검사 업무를 맡았다. 이씨는 2007년 2월 퇴사한 이후 2008년 6월 다발성경화증 진단을 받았다. 이씨는 2010년 7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업무상재해 요양승인을 신청했으나 공단은 2011년 2월 업무상재해로 볼 수 없다며 이씨의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단은 "업무나 근무환경 등으로 인해 발병했는지 확인되지 않아 업무와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 근로복지공단 ‘업무관련성 인정 어렵다’는 객관적 데이터로 2심 승소, 대법에선 고배
1심에선 삼성디스플레이가 보조참가자로 참가해 근로복지공단을 지원했다. 요양불승인처분 취소 소송의 당사자는 원고인 근로자와 피고인 공단이지만 공단의 결정에 따라 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클 경우 해당 기업이 보조참가자로서 재판부에 소장을 내고 공단을 지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공단이 삼성의 대형로펌 변호인단의 도움을 받는 구조라는 지적이 제기되자 삼성은 1심 도중 소를 취하했다.
공단은 1심에선 별도 변호인 선임 없이 공단 직원으로만 소송을 수행했다. 공단은 삼성의 소취하 이후 2심부터 근로복지공단 사내변호사 나정은(39·사법연수원 38기) 변호사를 투입했다. 나 변호사는 “산재보상법상 업무상 사유에 따른 질병으로 인정되려면 업무와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하고 그 증명 책임은 원칙적으로 근로자 측에 있다”고 주장해 2심에서 승소했다.
나 변호사는 한국산업안전공단과 산업안전보건연구원 등의 자료를 근거로 제시했다.
한국산업안전공단이 2010년 12월 실시한 조사 결과에서 역학조사평가위원 11명 중 5명은 이씨의 업무가 다발성경화증 자체를 발생시켰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고, 4명은 업무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높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11명 중 9명이 직접적 원인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질병과 업무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또 삼성전자가 2010년 8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의뢰한 역학조사에서도 다발성경화증에 대한 업무 관련성을 판단할만한 충분한 의학적 검토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업무관련성이 높다고 단언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 연구원은 사업장을 방문해 공정과 작업 내용을 확인하고 동료 근로자와 면담조사를 실시한 뒤 역학조사결과보고서를 작성했다.
2심 재판부는 “원고가 교대 근무, 초과근무 등으로 다소 많은 양의 업무와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했지만 제출된 증거만으론 원고가 통상적인 근로자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넘는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인정하기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객관적 데이터도 중요하지만 간접 증거만으로도 질병과 업무 사이 관련성을 판단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직접적인 증거가 없더라도 근로자의 취업 당시 건강상태, 질병의 원인, 작업장에 발병원인이 될 만한 물질이 있었는지 여부, 발병원인 물질이 있는 작업장에서 근무한 기간 등 여러 사정을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며 하급심 결과를 뒤집었다.
나 변호사는 지난해 근로복지공단을 퇴사해 법무법인 로고스로 옮겼다.
◆ 소형로펌 다산, 3심까지 뚝심 변론끝에 역전
이씨를 대리한 다산의 김칠준(57·19기) 대표변호사와 조지훈(43·38기) 변호사는 3심에서 역전에 성공했다.
다산은 1, 2심에서 첨단산업의 경우 기존 산재와는 달리 봐야 한다며 특수성을 강조했지만 1, 2심은 다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산은 “첨단산업분야에선 작업현장에서 생길 수 있는 직업병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며 “첨단산업은 발전 속도가 빨라 작업장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이 빈번히 바뀌고 화학물질 자체나 작업방식이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경우도 많아 산업재해 발생원인을 사후적으로 찾아내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다산은 1, 2심에서 이씨의 업무환경을 강조했다. 다산은 “다발성 경화증의 발병 원인 중 자외선 노출 부족과 유해물질 노출 등 업무환경적 요인이 있다”며 “이씨는 LCD 패널의 오염된 부분을 이소프로필알코올로 닦는 등 유해 화학 물질에 노출됐다”고 했다. 하지만 1, 2심 재판부는 “제출된 증거만으로 원고가 삼성전자에 근무하면서 다발성 경화증에 걸릴 정도로 자외선에 적게 노출됐는지 알 수 없고, 이소프로필알코올을 다룬 빈도도 높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다산은 상고심에서 “민사소송상 원고에게 입증 책임이 있지만 회사가 영업비밀 등을 이유로 공정에 사용된 화학물질에 대해 밝히지 않는 등 현실적으로 입증이 어렵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은 다산의 주장을 받아들여 회사가 협조하지 않는 상황 등은 근로자에게 유리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희귀질환에 대해 특정 사업장에서 발병률이 높거나 사업주의 협조 거부 등으로 그 질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들을 특정할 수 없었다는 등의 사정이 인정되면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이씨가 유전적으로 다발성 경화증에 대한 가족력이 없어 유전적인 요인보다 환경적 요인으로 발병했다고 강조한 것도 대법원에선 받아들여졌다. 다산은 환경적 요인을 강조하기 위해 이씨의 작업 과정을 상세히 서술했다. 다산은 “검사작업 사업장은 공정 전체가 하나의 개방된 공간으로 이뤄져 작업장 내 어느 하나의 세부공정에서 유해화학물질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이 별도로 여과되거나 배출되지 않고 작업장 내 계속 머무르는 구조였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은 “이씨가 입사 전 건강에 별다른 이상이 없었던 점, 이씨가 검사작업을 한 사업장은 세부공정에서 유해화학물질이 발생하더라도 별도로 여과되거나 배출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이씨가 이러한 작업장에 계속 머무는 구조였던 점 등이 인정된다”며 다산의 손을 들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