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카메라의 묘미는 기다림이에요. 사진이 어떻게 나올까 궁금해하며 보내는 시간이 낯설기도 하고 재미있어요."

직장인 유한나(28)씨는 요즘 필름 카메라에 푹 빠져 있다. 필름 한 통마다 찍을 수 있는 사진은 딱 24장. 디지털카메라처럼 실컷 찍고 마음껏 지울 수 없으니 신중하게 셔터를 누른다. 필름을 다 쓰고 나면 사진은 사흘 뒤 인화돼 나온다.

일주일 전 찍었다는 그의 사진을 보니 볕이 끼어들어 붉은 반점이 생긴 것도 있고, 초점이 어긋나 희뿌연 수채화처럼 돼버린 것도 있다. 인상 깊은 실패작을 남긴 그의 카메라는 사실 진짜 필름 카메라가 아니다. 필름 브랜드 '코닥'에 '구닥다리' 의미를 더해 패러디한 스마트폰 앱(App) '구닥'이다.

필름 카메라 안 써본 젊은 세대가 열광

필름 카메라를 모방한 사진 앱이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 마구잡이로 찍은 사진을 '용량'으로 인식하는 스마트폰 시대에 필름 카메라 앱은 '불편함'을 매력으로 내세운다. 스마트폰 제조사들은 경쟁적으로 고화소 카메라를 탑재하고 있지만, 소비자는 오히려 '필름 카메라로의 퇴행'을 감행하는 중이다.

필름카메라 앱 ‘구닥’은 빛의 번짐·왜곡·충돌 등이 일어난 아날로그적인 느낌의 사진을 만들어낸다. 왼쪽부터 걸그룹 ‘레드벨벳’의 아이린, 서울 광화문광장의 낮과 밤 풍경.

필름 카메라 앱으로 가장 유명한 '구닥'(1달러)의 경우 국내 개발자가 출시한 지 한 달 만에 17개국에서 42만5000건 가까이 팔렸다. 29일 현재 '구닥'은 애플 앱 스토어 유료 다운로드 1위, 필름 카메라 느낌으로 색감을 바꾸는 기능이 포함된 '칼라'는 무료 다운로드 1위다. 안드로이드 앱 스토어에도 사진에 아날로그 느낌을 더하는 비슷한 종류의 앱들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필름 클래식'을 사용하는 고교생 이화선(18)양은 "배우 한예슬, 모델 아이린 같은 스타들이 필름 카메라 앱으로 찍은 사진을 소셜 미디어에 올리면서 여고생들 사이 큰 유행이 됐다"고 했다.

앱 화면 디자인은 1990년대 유원지에서 팔던 3000원짜리 일회용 필름 카메라 모양을 본떴다. 이들 앱으로 찍은 사진은 어딘가 명료하지 않다. 눅진한 색감, 따뜻한 채도 등 아날로그 느낌이 물씬하다. 사진을 자동 보정해주는 '오토(auto) 모드'가 없으니 빛에 따라 번짐, 왜곡, 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

"3일은 못 기다려" 디지털 금단 현상 호소하기도

'구닥'에 따르면, 앱은 18~24세 여성에게 특히 인기다. 필름 카메라를 실제로 사용해본 적 없는 세대라 불편함에 열광하고 실패작도 신선하다고 여긴다. 이들에게 필름 카메라는 복고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다. 경험해보지 못한 아날로그 감성을 앱을 활용해 유사 체험하는 것이다. 사진가 정민호(29)씨는 "젊은 세대는 필름 카메라 앱으로 찍은 사진을 육안으로 봤을 때 아주 어릴 적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며 "오래돼 바랜 듯한 분위기가 이 세대에겐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온다"고 했다.

하지만 디지털 속도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필름 소진 시점으로부터 3일이 지나서야 사진을 스마트폰 화면에 띄워 주는 아날로그적 규칙을 버거워하는 경우도 많다. 필름을 돈 주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필름 한 통을 다 쓰고 나면 새 필름이 생성될 때까지 또 1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이 때문에 휴대폰 날짜 설정을 바꿔 사진을 미리 꺼내보는 '편법'이 젊은이들 사이에 애용된다. 대학생 김민지(25)씨는 "소셜 미디어에 올릴 사진을 사흘 동안 기다리는 것은 너무 힘들어 휴대폰 날짜를 임의로 3일 뒤로 변경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