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청년경찰'로 촉발된 중국 교포사회의 불만은 아직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전국 40여 개 중국동포 단체장은 최근 모임을 가지고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하기로 했다. 또 영화 제작진의 대림동 방문 사과, 영화 상영 중단 등을 요구했다.
중국 교포들의 이러한 불만은 한국인에게도 낯선 일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할리우드 영화의 '한국인 비하' 때문에 속상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2015년 영화 '버드맨'으로 인한 것이다. 이 사건을 먼저 짚어본 뒤, 오랜 세월동안 할리우드에서 공공연하게 이뤄지던 동양인 비하 사례에 대해 살펴보자.
2015년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감독상·촬영상·각본상 4관왕에 올랐던 영화 '버드맨'은 때아닌 '김치 논란'에 휩싸였다. 극중 주인공의 딸인 샘 톤슨 역을 맡은 여배우 엠마 스톤이 내뱉은 대사 'smells like f**king Kimchi' 때문이다. 그녀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꽃집에서 나오며 이같이 말한다. 해석하면 'X같은 김치 냄새가 난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버드맨'의 국내 홍보사는 '캐릭터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한 대사'라고 해명했지만, 개봉도 전에 '한국인 비하'로 먼저 소문난 '버드맨'은 결국 국내 흥행에 실패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한국인 비하' 논란을 모든 이들이 동의한 것은 아니다. 일부 관객은 '캐릭터의 특성을 묘사한 것'이라는 제작사와 홍보사의 주장에 수긍했다. 실제로 샘은 마약 중독으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이며, '김치' 외에도 거친 대사를 많이 한다. 문화평론가 한동원은 "'버드맨'이 비하하고 비방하고 혐오하는 대상은 대충만 정리해도 열 손가락을 모두 채운다"며 "'X같은 김치 냄새'라는 대사는 한낱 '지나가는 사람 47번'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할리우드 영화 '동양인 비하'의 시작점으로 여겨지는 작품은 1961년 작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다. 영화 초반 주인공 홀리(오드리 헵번)의 이웃으로 나오는 일본인이 논란의 주인공이다. 툭 튀어나온 뻐드렁니와 어눌한 말투,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 게다가 히스테릭한 성격까지 갖춘 이 인물은 멋지고 예쁜 모습을 한 서양 배우들과 완전히 상반된다.
▼아래 사진: 동양인 분장을 하고 미스터 유니오시를 연기한 할리우드 배우 미키 루니. /조선DB
여기에 이 배역은 일본인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 배우가 '동양인 분장'을 한 채 연기해 '화이트 워싱(whitewashing)' 논란도 낳았다. (할리우드의 '화이트 워싱'에 대해선 아래 항목에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속 일본인 캐릭터는 훗날 이 영화의 유일한 옥에 티로 지적받는다.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도 '가능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배역을 바꾸고 싶다'고 본인의 선택을 후회했다고 한다.
1990년대 만들어진 할리우드 영화에서 한국인은 미국 땅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엑스트라로 많이 나왔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전형적인 '이민자'의 모습이다. 당시에는 한국 배우를 구하기 힘들었던 탓에, 한국인이 아닌 동양인 배우가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1993년 제작된 영화 '폴링 다운'에는 수퍼마켓을 운영하는 한국인 이 씨가 나온다. 주인공(마이클 더글러스)이 공중전화를 쓰기 위해 동전을 바꿔 달라고 하자, 한국인 주인은 "물건을 사라"고 맞선다. 그러자 화가 난 주인공이 "우리(미국)가 너희를 얼마나 도와줬는데 은혜도 모르는 민족"이라며 그를 구타한다. 이 씨는 또 물건값에 바가지를 씌우는 모습도 보인다. 한국인 비하 논란이 불거지자, 이 영화의 배급사였던 워너브러더스 코리아는 국내 상영을 철회했다.
1989년 작 '똑바로 살아라'에서도 한국인 구멍가게 주인이 등장하는데, 돈만 밝히고 미국 사회에 전혀 융화되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작품 속 이 한국인은 미국 사회에서 또 다른 차별 집단으로 상징되는 흑인들에게까지 조롱받는다. 프랑스 출신의 거장 뤽 베송 감독도 본인의 영화 '택시'(1998)에서 차 안에서 잠을 자며 2교대로 일하는 한국인을 등장시켰다. 그러면서 "저들(한국인들)은 조국이 가난해서 열심히 일해"라는 대사를 썼다. 아카데미 수상작인 영화 '크래쉬'(2004)에서는 '조진구'라는 한국인 남자가 응급실에 누워서도 아내에게 돈 얘기를 하는 '돈 벌레'로 나온다.
1970년 칸 영화제와 아카데미에서 수상한 영화 '매쉬'는 6·25 전쟁 당시 한국에 있던 미군 야전병원을 배경으로 하는 전쟁 코미디 영화다. 영화 속에는 '한국 같지 않은' 한국의 풍경이 계속 비친다. 몸을 파는 여성들은 기모노를 입고 있고, 사람들은 중국식 복장을 하고 다닌다. 이에 대해 한국을 배경으로 한 건 단지 위장일 뿐, 실제로는 베트남과 베트남전을 비판하기 위한 설정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하지만 지나치게 후진적으로 묘사된 한국의 모습에 많은 한국인들은 불쾌감을 느꼈다.
'개고기' 논란도 스크린에서 예외가 아니다. 북한 김정은을 조롱한 영화 '디 인터뷰'(2014)에서는 '개고기 안 먹는 나라로 가자'는 대사가 나와 한국인을 분노케 했다. 해당 영화에서는 동해를 '일본해'로 지칭하는 대사도 나온다. 1992년 작 '글렌게리 글렌 로스'에서는 한 주인공이 자신은 8만 달러짜리 BMW를 타고, 상대방은 현대차나 탄다는 식으로 조롱하며 한국을 경제 후진국으로 표현한다.
한국을 미국에 대재앙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의 진원지로 표현한 영화들도 있다. 영화 '아웃 브레이크'(1995)에서 에볼라보다 더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미국에 퍼뜨리는 숙주는 바로 한국 선박 '태극호'에 타고 있던 원숭이다. '월드워Z'(2013)는 좀비 바이러스가 한국의 평택 미군기지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암시한다. 최민식이 출연해 화제가 된 영화 '루시'(2014)에서는 한국인을 비롯한 동양인이 국제 마약 밀매조직에 얽혀있는 것으로 나온다.
2000년 이후 할리우드 영화는 노골적으로 북한을 '주적'으로 등장시킨다. 하지만 북한의 실제 모습에 대한 철저한 사전조사 없이 그저 '조롱'을 목적으로 한 것이 많아, 한국인들의 공감도 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2002년 개봉한 영화 '007 어나더데이'에서 북한군은 피도 눈물도 없는 전쟁광으로 묘사되며, 한국군은 미군의 지배를 받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북한'이라고 표현된 배경에서는 동남아에서 보일 법한 물소가 돌아다닌다. 이 영화가 나오자 한국의 네티즌과 시민단체는 '007 안 보기' 운동을 벌였고, 세계적으로 흥행했던 '007 어나더데이'는 국내에서만 참패했다.
북한을 테러단체로 만든 영화 '백악관 최후의 날'(2013)은 북한의 우두머리가 한국 국무총리의 경호원으로 위장해 백악관에 잠입한다. 영화 속에서 '주한미군이 없으면 한국은 죽는다'는 식의 대화도 나온다. 게다가 북한 사람으로 설정된 주인공들이 매우 어색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모습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백악관 최후의 날'은 남한과 북한 모두를 비하하는 듯한 설정과 개연성 없는 스토리 때문에 흥행 실패는 물론, 안 좋은 평가만 받았다. 2012년 영화 '레드 던'은 본래 미국 워싱턴주를 침략하는 중국군이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미국 제작사 측은 중국 영화시장에서 외면받을 것을 우려해 중국군을 북한군으로 수정했다.
'화이트 워싱(Whitewashing)'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백인 캐릭터가 아님에도 무조건 백인 배우를 캐스팅하는 관행을 뜻하는 용어다. '화이트 워싱'의 역사는 매우 오래됐다. '몽골인' 칭기즈칸은 영화 '정복자'(1956)에서 파란 눈의 '미국인' 칭기즈칸(존 웨인이 연기)으로 바뀌었고, 6·25 전쟁을 다룬 영화 '전송가'(1957)에서는 한복을 입은 인도 출신의 여배우 안나 카슈피가 '한국 여자'로 나왔다. 앞서 언급한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나오는 일본인 배역도 화이트 워싱의 한 예다.
'화이트 워싱'은 항상 비난 받으면서도, 최근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집트가 배경인 최근 영화 '엑소더스:신들과 왕들'(2014), '갓 오브 이집트'(2016) 두 편에서는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백인이다. 이에 이집트는 물론 미국 내에서도 '화이트 워싱' 비난이 거셌는데, 급기야 '갓 오브 이집트'의 감독 알렉스 프로야스는 "좀 더 책임감을 갖고 캐스팅에 임했어야 했다"고 공식 사과했다.
올해 3월 개봉한 영화 '공각기동대:고스트 인 더 쉘'도 화이트워싱 논란에 시달렸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한 영화인데 미국 여배우 스칼렛 요한슨을 주연으로 내세웠다. 제작 단계부터 불거진 논란에 대해 요한슨은 자신이 연기한 인물은 '사람의 뇌가 들어있는 기계, 즉 민족 정체성이 없는 캐릭터'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영화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아시아계 역할에 캐스팅 됐던 영국인 배우가 자진 하차하는 일도 벌어졌다. 할리우드 영화 '헬보이 리부트(reboot)판'에서 일본계 미국인 역으로 발탁된 에드 스크레인은 "캐릭터의 인종을 알게 된 후 이를 바로잡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화이트 워싱'의 수십 년 역사에서, 이것 때문에 하차를 한 배우가 최초 사례라는 것이 더 놀랍다.
과거 50~60년대에는 "아시아인이나 흑인 역할에 쓸 배우가 부족해서 화이트 워싱이 불가피하다"는 옹호가 통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인종적인 배경을 무시한 캐스팅은 차별이라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하지만 제작자들은 '흥행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차별은 미안하지만, 이름 없는 동양계, 혹은 흑인 배우를 주연으로 내세워 흥행에 실패한 사례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끊이지 않는 헐리우드 '화이트워싱'… 백인 배우도 자진 하차]
영화 '청년경찰'의 조선족 비하 논란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언제부턴가 한국 영화에서 조선족은 범죄의 온상처럼 묘사되고 있다. 영화 '황해'(2010)에서 조선족은 돈을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청부살인 브로커다. 비하 논란이 일자 나홍진 감독은 "비하가 아니라 오히려 조선족에 대한 애정으로 '황해'를 찍었다"고 해명했다. 이후 나온 '신세계'(2013), '차이나타운'(2014), '아수라'(2016) 등의 영화에서도 조선족은 잔인한 범죄자나 장기매매 조직원 등으로 그려진다. 한때 조폭 영화가 성황을 이뤘던 한국에서 이제 조폭 대신 조선족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는 비판 섞인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청년경찰'이 유독 큰 비난에 시달리는 이유는 '대림동'이라는 실재하는 지역을 영화에 그대로 썼기 때문이다. 영화 속 대림동은 가출 소녀들의 난소 적출·매매가 이뤄지고, 몸싸움이 수시로 벌어지는 곳이다. "이곳에는 여권 없는 중국인이 많고, 칼부림도 자주 난다. 경찰도 잘 안 들어오는 곳"이라는 대사까지 나온다. 영화의 이러한 설정에 대해, 중국 교포들은 "그동안 우리에 대한 편견을 개선하려고 노력했는데 모두 허사가 됐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이렇게 깨끗한 범죄소굴 봤냐" 대림동 중국동포 울분]
최근 종영한 드라마 '죽어야 사는 남자'(MBC, 이하 '죽사남')는 중동의 가상 국가 백작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신선하다는 호평을 받았지만, 그와 동시에 무슬림 희화화 논란도 낳았다. 극 중 주인공이 이슬람 복장을 하고 와인을 마시는 장면과 히잡을 두르고 비키니를 입은 여성들의 모습 등이 문제가 됐다. 코란 근처에 발을 갖다 대는 듯한 '죽사남'의 포스터에도 많은 무슬림들이 분노했다. 이슬람 경전인 코란은 손을 씻고 만져야 할 정도로 무슬림에게 신성한 물건이다.
논란이 커지자 MBC는 홈페이지에 한국어·영어·아랍어 3개 언어로 된 사과문을 올렸다. 하지만 "'죽사남'은 등장인물, 인명, 지명 모두 픽션"이라고 해명하는 MBC의 태도에 시청자들의 분노는 더욱 치솟았다. '지어낸 이야기면 다른 문화를 무시해도 되느냐'는 게 그 이유였다.
['죽사남', 무슬림 비하 논란 공식 사과 "왜곡 의도 없었다"]
최근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인종 비하' 논란이 잇따라 일었다. 일각에선 '힘겹게 쌓은 한류 이미지를 한순간에 망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다양한 문화를 소재로 콘텐츠를 만드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특정 문화나 인종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배려가 필수적이다. 우리도 '비하' 때문에 상처 받았던 경험이 있던 만큼, 최근 불거진 몇 차례 논란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선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