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 안경상가, 전국 안경 유통의 50% 담당… 안경산업 지탱하는 클러스터
80~90년대 호황 누렸지만 라식∙라섹 확대에 수요 급감… 안경원 300→150개로 줄어
매출 30% 감소, 억대 권리금도 사라져…
가업 잇는 청년 사장들, 온라인으로 활로 찾아
“할 말 없어요, 딴 데 가세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온화한 미소로 호객행위를 하던 남대문 OO안경원의 점원은 기자가 신원을 밝히자 태도가 180도 돌변했다. “장사도 안돼서 죽겠는데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거요? 거친 말 나오기 전에 가세요.” 그가 이렇게 날이 선 데는 이유가 있다. 몇 달 째 날씨가 무덥고 비도 오락가락해 장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날도 오전 내내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고, 오후 들어 다시 폭염이 내리쬐고 있었다.
지하철 4호선 회현역 5번 출구에서 2번 출구 사이에 위치한 남대문 안경상가는 전국 안경 유통량의 50%를 차지하는 ‘안경의 메카’로 통한다. 이곳에는 오랜 역사와 경력을 지닌 안경 도소매점들이 즐비하다. 한때 안경점이 300여 개까지 있을 정도로 성행했지만, 이곳을 찾는 이들이 줄면서 지금은 150여개로 매장이 줄었다. 상가 내 공실률도 30%에 달한다. 한 상인은 “전체적으로 매출이 30%가 줄었다”고 토로했다.
◆ 남대문 안경골목, 150여 개 매장이 명맥 이어… 매출 30% 뚝
취재는 쉽지 않았다. 다섯 차례 연달아 문전박대를 당한 끝에, 기자는 취재를 포기하고 안경을 맞추기로 했다.
한 안경원을 찾았다. 간만에 손님을 맞는지, 주인은 기자를 극진히 환대했다. 요즘 웬만한 백화점에서도 고객 응대를 하지 않는게 추세인데, 그 친절함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주인은 기자가 고민할 새도 없이 빠르게 문진(?)을 이어갔다. “원하는 가격을 말해주면 내가 맞춰서 해줄게. 시력이 얼마나 돼요? 평소에 안경을 자주 껴요? 어떤 스타일을 찾아요?”
이 매장은 국산 안경테부터 수입 안경테까지 다양한 안경태를 구비하고 있다. 가격도 3만 원대부터 50만원 대까지 천차만별이다. 국산 안경의 경우 30~50%, 수입 안경의 경우 시중보다 10~30%정도 싸게 살 수 있다.
“아버지 때부터 여기서 27년 간 장사를 했어요. 요즘엔 라식 수술도 흔하고 노안 수술도 많이 해서 예전만큼 손님이 많지 않지. 그래도 오는 분들은 우리 가게만 와요. 안경 잘 어울리네. 어떻게 이 테로 할까? 렌즈까지 5분이면 돼요.” 주인은 기자의 질문에 친절히 답하면서도, 손님을 놓칠까 노심초사했다.
몇 군데를 더 돌아봤다. 안경점을 찾는 이들은 대체로 중년과 노인들이었다. 대부분 단골이다. 종종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청소년들과 중국 관광객도 보였다. 한 안경점에서 만난 60대 여성은 얼마 전 딸과 안경을 하나씩 맞춰 갔는데, 다른 분위기의 안경을 추가로 맞추고 싶어 시장에 나왔다고 했다. “남대문에서만 안경을 사요. 물건도 많고, 가격도 싸니까… 우리 가족들 모두 여기서 안경을 맞추죠.”
남대문 상가의 안경점은 대부분 30~40년 간 자리를 잡고 있는 지역 터줏대감들이다. 1970년대 대학에 안경광학과가 신설되고 졸업자들에게 안경사 자격증이 주어지면서, 안경점이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이곳 안경점 주인들도 단순한 상인들이 아닌 전문 안경사다.
1980년대 후반~90년대까지만해도 안경은 불티나게 팔렸다. 하지만 2000년대 접어들면서 안경 수요는 눈에 띄게 감소했다. 안경에서 콘텍트렌즈, 다시 라식∙라섹 수술이 대중화하면서 안경을 찾는 이들이 줄어든 것이다. 간혹 패션 안경테가 유행하긴 했지만, 줄어드는 수요를 잡기는 역부족이었다.
안경사협회 서울 중구 지회장을 맡고 있는 이병렬 삼천리안경 사장은 “중구만 해도 명동을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분할해 2개의 지회가 운영될 정도였는데, 안경점이 줄면서 7년 전부터는 하나로 통합됐다. 지금 중구에는 248개의 안경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목이 좋은 남대문 안경점의 경우 권리금이 한때 10억 원에 달했지만, 이제는 몇몇 매장을 제외하곤 권리금이 없어졌다. 임대료 상승도 동결됐다. 한 상인은 “원래 1~2년 간격으로 임대료가 인상됐지만, 최근에는 오르지 않았아요. 그래도 임대료를 내기 버거운 상황”이라고 밝혔다.
◆ ‘안경의 모든 것’이 있는 곳… 불황에도 대를 이어 꿈을 키우는 젊은이들
그럼에도 여전히 남대문에 안경을 맞추러 오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남대문을 찾는 이유는 싼 가격 때문만은 아니다. 이병렬 사장은 “요즘 소비자들은 똑똑해서 고작 몇 만원 아끼려고 시간과 발품을 팔아 여기까지 오지 않아요. 좋은 안경을 좋은 값에 사러 남대문에 오는 겁니다. 여기만큼 다양한 제품을 합리적으로 살 수 있는 곳이 없으니까요”라고 말했다.
글라스박스엔 유난히 젊은이들이 많았다. 이곳엔 요즘 유행하는 둥근 메탈 안경테를 비롯해 가수 싸이가 껴 유명세를 탄 마스카, 공효진이 쓴 스테판크리스티앙 선글라스 등 젊은이들이 좋아할만한 제품들이 가득했다.
글라스박스는 체인점이다. 원래 이곳은 신한안경이라는 상호를 썼지만 2014년 체인으로 전환했다. 점원은 체인이어도 남대문 시세에 맞춰 싸게 판매한다고 했다. 매장 안에는 젊은 부부가 이것저것 안경을 써보고 있었다. 휴가를 내 지방에서 왔다는 이 커플은 “디자인이 정말 다양하고 가격도 저렴해요. 안경도 선글라스도 다 예쁘고, 역시 서울은 다르네요”라고 말했다.
온라인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는 곳도 있다. 남대문 중앙상가에 위치한 도매안경은 2대에 걸쳐 안경을 판매하고 있다. 원래 도매 판매만 했지만, 도소매로 업종을 변경하고 블로그를 운영해 온라인 구매에 익숙한 젊은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국내 하우스 브랜드부터 명품 선글리스까지 상품의 상세 이미지를 블로그에 올리고 판매한다.
남대문에는 안경점만 있는 건 아니다. 40년 넘게 안경을 수리하고 있는 안경병원(다올 옵티컬)는 남대문 안경상가와는 동 떨어진 남대문 파출소 옆에 위치해 있다. 서울에만 4만 여개의 안경점이 있는데, 반 이상이 이곳에 수리를 맡긴다. 부러진 안경테를 고치는 것부터 시작해 아예 안경테의 디자인을 바꿔주기도 한다.
기자가 찾았을 땐 20~40대로 보이는 청년 4명이 수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40대 초반의 김영현 사장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안경 수리를 하고 있다. 아버지에게 수리 기술을 배웠고, 지난해 아버지가 칠순을 맞아 은퇴하면서 가업을 물려받았다.
“워낙 경기가 불안정해서 기술직을 갖는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이 일은 제가 원하면 계속 할 수 있으니까요. 안경 업계가 어려워지면서 예전보다 일감이 줄었어요. 원래 안경점을 대상으로 수리를 하는데, 문의를 주는 개인들이 많아 조만간 블로그를 오픈해 본격적으로 서비스를 할 생각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