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1월 남극점을 다시 걸어서 밟겠다는 로버트 스완(왼쪽)이 모험에 동행할 아들 바니(23)와 최근 남극 대륙에서 썰매 끄는 훈련을 하는 모습. 바니는 일곱 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남극과 북극에 다녀왔지만 60일이나 되는 장기 원정은 처음이다. 발대식 전까지 바니는 근육을 7㎏ 늘려야 하고 로버트는 유연성을 조금 길러야 한다. 위험한 곳에 같이 갈 때 아내가 싫어할 것 같다고 말하자 부자(父子)가 동시에 답했다. “우리를 믿거든요.” 작은 사진은 함께 서울을 찾은 로버트·바니 부자.

1985년 11월 3일 서른 살 영국 청년 로버트 스완은 동료 2명과 함께 남극 땅을 밟기 시작했다. 뉴질랜드에서 가까운 남극 땅에서 시작한 이 탐험의 목적은 걸어서 남극점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눈만 내놓은 채 얼굴을 마스크로 전부 가렸고 귀까지 덮는 털모자와 오리털 상하의로 무장했다. 허리춤에는 160㎏짜리 짐썰매를 연결했다. 몸집만 한 짐썰매에는 텐트와 침낭, 식량과 구급상자까지 70일을 견디는 데 필요한 것들을 실었다. 영하 89도 추위는 입김이 곧바로 얼어붙을 정도였다. 의지할 곳은 태양의 위치와 자신에 대한 믿음 뿐이었다. 70일간 1400㎞를 걸었다. 몸무게가 33㎏ 빠진 뒤에야 그는 남극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인류 역사상 아무런 외부 지원이 없는 가장 긴 여정이었다. 1986년 1월이었다.

2년 뒤 그는 지구 정반대 북극점을 밟았다. 이번에도 걸어서였다. 북극점을 향해 걷는 도중 녹아버린 빙하로 탐험대 모두가 익사할 뻔하는 큰 사고를 겪었지만 이번에도 그는 850㎞를 걸어 북극점에 도착했다. 그는 인류 최초로 남극점과 북극점에 모두 걸어간 사람이 됐다.

61세가 된 그가 올해 11월 한 번 더 걸어서 남극점에 간다. 이번에는 아들과 함께 걷는다. 우리나라 국제환경보호단체 'W재단'이 주최하는 글로벌 자연보전 프로젝트 'HOOXI(후시)'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HOOXI'는 '숨쉬다'라는 뜻의 중국어로, W재단이 지난 2016년부터 캄보디아에 숲을 조성하고 남태평양 산호를 복원하는 등 세계 곳곳의 자연을 지키려는 프로젝트다. 남극점과 북극점을 다녀온 뒤부터 줄곧 빙하 녹는 속도 늦추는 운동을 해온 스완과 극지방 환경을 보전하자는 W재단의 뜻이 맞아떨어졌다. 최근 W재단 초청으로 방한한 그를 서울 한 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이렇게 쓸데없이 쓰는 전기부터 아껴야 한다"며 방을 돌아다니며 등을 전부 껐다. "이렇게 불을 꺼도 커튼을 열면 환하잖아요. 서울의 아름다운 풍경도 한눈에 보이고요."

"난 탐험가가 아닌 생존자"

―남극점 탐험을 다시 한다면서요.

"죽을 고비는 그때 다 넘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다시 하게 됐네요. 이번엔 32년 전보다 열흘 짧은 60일 동안 걸어요. 그리고 그때 같진 않을 거예요. 몸도 늙었고(웃음), 옷이나 신발, 썰매 같은 것도 30년 전보다 훨씬 발달했으니까 좀 더 가볍고 수월할 거고요. 지금은 스마트폰이라는 거대한 발명품이 있잖아요. 인터넷과 GPS라는 훌륭한 발명품도 있고요. 혹시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어디 있는지 단번에 알아채고 구하러 오지 않을까요."

―그때는 누가 구하러 올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던 건가요?

"구하러 오긴커녕 구하러 오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조차 불가능했죠. 인공위성이 있지만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정교하게 위치를 잡아낼 기술이 없었죠. 남극은 TV에서 보는 것과 다른 곳입니다. 펭귄과 물개가 뛰노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남극은 남극땅의 가장 외곽이에요. 남극 반도라 불리는 곳이죠. 그곳은 매년 3월이 되면 영하 5도까지 기온이 올라갈 정도로 따뜻해요.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남극의 얼굴은 지킬과 하이드의 하이드처럼 바뀝니다. 발을 딛는 순간 '이곳은 내가 죽길 원한다'는 느낌을 받아요. 공포 그 자체죠."

남극점으로 가는 길은 순간마다 생사를 가르는 여정이었다. 깊이 100m가 넘는 크레바스(crevasse·빙하의 틈)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크레바스에 발이 빠지는 건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다. 식량 문제도 있었다. 영하 89도에서 얼지 않는, 수분이 전혀 없는 음식만 챙겨야 했다. 수분이 미량이라도 들어간 음식을 철저히 배제하니 음식이 아닌 재료 수준의 식량만 남았다. 하루에 버터 220g을 초콜릿처럼 씹었다. 살라미 소시지와 비스킷을 먹고 식용유를 입에 짜 넣었다. 최대 효율을 낼 수 있는 식품이 기름이기 때문이었다.

―기름을 마셨는데 몸무게가 33㎏이나 빠졌습니까.

"한 사람이 끌 수 있는 짐썰매 최대 무게가 160㎏이었어요. 그 이상은 덩치가 큰 나도 도저히 끌 수가 없어요. 70일간 먹을 최소한의 식량만을 챙겨야 했어요. 계산해보니 하루에 7000㎉를 먹어야 체중을 유지할 수 있는데 그 식량으로는 하루 5400㎉만 먹을 수 있었어요. 체중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죠."

―두 달 넘게 그런 음식만 먹고 버틸 수 있나요?

"맛이나 질이 문제가 아니었어요. 생존이자 스스로와의 싸움이었거든요. 하루종일 짐을 끌면서 걸으면 정말 너무 배가 고파요. 그때 순간적으로 '오늘 비스킷 하나만 더 먹을까?' '살라미 한입만 더 먹을까' 하는 생각이 스칩니다. 그걸 이겨내는 싸움을 수도 없이 해야 해요. 지금 당장 더 욕심내다가 말 그대로 죽을 수 있는데 그 순간엔 이성적 판단이 안 되거든요. 바람소리 때문에 동료들과 말하는 것조차 힘듭니다. 오로지 혼자 이겨내야 하는 거예요."

남극땅에 남극점이 어디 있다는 표지판은 없다. 태양의 방향을 계산해 나아가는 방법뿐이다. 허허벌판 얼음땅에서 남극점을 1도라도 벗어나면 1주일 이상 주위를 맴돌아야 한다. 1주일이 지체되면 식량이 바닥나 죽게 된다는 뜻이다. "운이 좋아 제대로 1400㎞를 걸어간" 그의 탐험대는 70일 만에 남극점을 밟을 수 있었다. 목표를 이뤘다는 환희는 잠시였다. 남극점에서 마스크를 벗은 그는 장갑 낀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았다. 살점이 떨어지는 것처럼 아팠기 때문이었다.

―무엇 때문이었나요?

"오존층에 뚫린 구멍에서 쏟아지는 자외선 때문이었어요. 위성사진을 찍으면 남극에 유독 오존층 파괴가 심하잖아요.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불에 덴 것처럼 고통스러워요. 원래 제 눈 색깔은 지금처럼 푸른 연두색인데 그 당시 사진을 보면 자외선에 타서 회색으로 변했어요. 나중에 다시 제 색깔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때까지 저도 그냥 평범한 영국 젊은이였어요. 분리수거도 할 줄 모르고, 전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모르는."

빙하가 녹는 것은 인류의 공포

1987년에 70일간 걸어 남극점에 도착했을 때 스완의 눈동자는 오존층 구멍을 통과한 자외선에 타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남극에 갈 때만 해도 분리수거도 안 하고 전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남극에 다녀온 뒤 환경운동가가 됐습니까.

"저는 제가 생존자라고 생각해요. 운동가도 탐험가도 아닌 생존자요. 죽음의 땅에서 살아남았으니까요. 그 뒤로도 거의 매년 사람들을 데리고 남극에 갑니다. 남극땅 근처에 배를 타고 가지요. 매년 빙하 모습이 달라져요. 점점 작아지고 부서지고 있어요. 재작년엔 나사(NASA)에서 '대한민국 두 배 크기만 한 빙하가 떨어져나왔다'고 발표까지 했어요. 원래 남극은 저에게만 공포였는데 이제 전 인류가 두려워해야 할 존재가 된 거예요. 북극도 마찬가지이고요. 이번에 다시 남극점에 걸어가는 것도 사람들에게 빙하가 녹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죠."

―빙하를 녹지 않게 할 수 있습니까.

"속도를 늦출 수는 있지요.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분리수거를 잘 하고 전기 플러그를 잘 뽑아놓고 물을 아껴쓰는 것 등이 있고요. 정부 차원에선 화력발전소 대신 친환경에너지를 권장하는 것 같은 정책이 있지요."

―학교에서 배우는 뻔한 것들 말인가요?

"뻔하지만 아무도 지키지 않는 것들입니다(웃음). 전 세계 사람들이 이 중에 한두 개만 지켜도 빙하가 지금보다 훨씬 천천히 녹을 겁니다. 장담할 수 있어요."

―빙하가 녹는 건 환경오염뿐 아니라 빙하기를 벗어났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는데요.

"맞아요. 그런데 환경오염이 이유 중 하나인 것도 확실합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도 어떤 요인이 빙하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확신은 못하지만 빙하가 녹는 요인이 무엇인지는 확신해요. 환경오염은 그 요인 중 하나죠."

―매년 사람들을 남극에 데려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가서 보는 순간 알아요. 느껴지거든요. 이미 녹아버린 빙하, 녹고 있는 빙하, 무너져 내리고 있는 빙하를 전부 볼 수 있어요. 살 곳을 잃은 펭귄과 물개들도 있죠. 1년에 한 번 200여 명씩 원정대를 꾸려서 3월에 남극으로 떠나요. 2주가량 배를 타고 남극을 관찰하죠. 아직 한국인은 한 명도 없었어요. 내년엔 한국인도 꼭 데려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