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돌고 돈다. 이 진리가 이번에도 통했다. 설마 1980~1990년대 패션 '흑역사' 아이템처럼 여겨지던 촌티 나는 힙색(hip sack·허리에 둘러매는 가방)이 지금 다시 유행할 줄이야. 미국 모델이자 세계적인 패셔니스타로 유명한 켄들 제너는 캐주얼룩과 오피스룩을 넘나들며 루이비통·샤넬 등 명품 힙색을 매치해 화제를 모았다. 소녀시대 수영도 빈티지한 데님 숏팬츠에 구찌 힙색을 벨트처럼 허리에 달아 앙증맞은 패션으로 눈길을 끌었다.
엉덩이 위에 매는 가방은 우리에겐 힙색이란 용어로 친숙하지만, 미국에서는 패니 팩(fanny pack), 영국에서는 범 백(bum bag)으로 잘 알려져 있다. 패니(fanny)와 범(bum)은 둘 다 '엉덩이'를 뜻하는 슬랭이다. 허리에 맨다고 해서 '웨이스트 백', 벨트처럼 맨다고 해서 '벨트백'으로도 부른다.
힙색의 유래는 지금처럼 옷에 주머니가 발달하기 전 중세 유럽에서 벨트에 주머니를 달아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는 과거 전대(纏帶)를 주로 사용했었다. 1980년대 미국에서 가벼우면서 잘 닳지 않는 나일론 소재 힙색이 나오면서 크게 히트했다. 국내도 이 무렵 힙색이 들어오면서 인기를 끌었다. 간호섭 홍익대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 교수는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가 시행되면서 각 여행사가 여권이나 지갑을 간편하게 넣기 좋고 소매치기 방지가 되는 힙색을 너도나도 사은품으로 제공하면서 1980~90년대 힙색은 전 국민적인 열풍이 됐다"고 회상했다.
경기 호황기였던 1980년대 그리워 레트로 패션 유행
최근 힙색의 유행은 현재 패션업계에 불고 있는 1980~90년대 레트로(retro·복고풍) 유행과 맞닿아있다. "영화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서 볼 수 있듯이 198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경제 호황기였어요. 풍요로웠던 그 시대를 떠올리며 1980년대 빈티지를 재해석하는 패션이 많이 등장한 거죠." 간호섭 교수의 말이다.
힙색 제품은 이스트팩·MLB 등 영 캐주얼 브랜드부터 구찌·프라다 등 럭셔리 브랜드까지 다양하다. 주요 소비층도 10~20대 학생부터 30~40대 직장인까지 넘나든다. 경기도 일산에 사는 박성주(19)군은 "최근 친구들 사이에서 자전거만큼 킥보드도 많이 타는데 간편하고 가볍게 멜 수 있어 힙색이 인기"라고 했다. 한 럭셔리 브랜드 관계자는 "길거리 패션으로 여겨졌던 힙색이 럭셔리 브랜드에서도 인기를 끄는 이유는 활동성 때문"이라며 "최근 패션업계에선 스트리트 패션과 오피스 패션이 절묘하게 결합돼 있으면서 활동성이 좋은 스타일이 주목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엉덩이 말고 어깨에 둘러야 요즘 스타일
아무리 힙색이 유행이라지만 옛날 부모님이 쓰던 제품을 그대로 매고 나가는 것은 곤란하다. 최신 유행의 힙색 스타일은 다양한 방법으로 착용할 수 있게 기능을 갖춘 것이 특징. 요즘 힙색은 엉덩이에만 매지 않는다. 끈을 조절해 슬링백처럼 어깨에 걸치거나 토트백처럼 가볍게 손에 들기도 한다.
구찌의 힙색은 벨트 대용으로 허리에 맬 수 있어 '벨트백'이란 이름이 붙었다. 프라다는 나일론으로 만든 남성 힙색이 인기를 끌면서 올해 봄·여름 컬렉션으로 클래식한 사각형에 가죽 소재로 만든 여성용 힙색을 선보였다. 허리에 벨트처럼 착용 가능하며 어깨끈이 따로 들어 있어 숄더백처럼 어깨에 착용할 수 있다. 올 가을·겨울에는 벨벳 소재로 만든 벨트백까지 새롭게 내놓아 패션피플들을 즐겁게 하고 있다.
알렉산더 왕은 줄에 변화를 줬다. 힙색에 실버 메탈 체인을 달아 허리에 두르거나, 가슴을 가로질러 걸치거나, 숄더백처럼 활용하는 등 모든 방식으로 연출 가능하다. 매끄러운 양가죽으로 제작해 고급스러운 디자인으로 지난 6월 국내에 처음 입고됐는데, 이번 가을·겨울 컬렉션 입고 수량이 벌써 완판됐다. 겐조는 이번 봄·여름 컬렉션에서 힙색을 사각형 파우치 모양으로 디자인해 복고적이면서 미래 지향적인 스타일을 선보였다.
패션홍보대행사 '비주컴' 손지희 대표는 "최근 복고 열풍에 힘입어 패션 아이템으로 재등장한 힙색은 매니시룩이나 복고풍 스타일과 매치하면 세련돼 보이고, 애슬레저룩에 허리에 가볍게 두르기만 해도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