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마트에서 사 마실 수 있는 맥주는 대형 주류업체 두세 곳의 제품밖에 없었다. 요즘은 얘기가 달라졌다. 국내 유통되는 수입 맥주는 400여 종. 맥주는 올해 1~7월 수입액이 와인과 위스키를 제치고 수입 술 가운데 1위를 처음 차지했다. 국내 소규모 양조장에서 생산되는 수제 맥주까지 합치면 500종 가까운 맥주가 유통되고 있다.
너무나 다양한 맥주가 판매되다 보니 맥주 마니아들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수백 가지 맥주로 꽉 채워진 대형마트 맥주 코너에 가면 기대만큼이나 고민도 깊어진다.
이 행복한 고민 해결을 위해 '맥덕(맥주 덕후·맥주 마니아)' 기자 세 명이 대형마트로 출동했다. "음식과는 와인보다 맥주가 훨씬 잘 어울린다"는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맥주 맛보러 '맥주 성지(聖地)' 벨기에로 휴가까지 다녀왔다"는 채민기 기자, "무림 고수(高手)들이 '도장깨기' 하듯 새로 생긴 맥줏집은 다 가본다"는 강정미 기자. 이 맥주 애호가들이 당신의 선택에 가이드를 주기 위해 각자 마트에서 즐겨 마시는 맥주 10가지를 골랐다.
라거의 재발견 '필스너 우르켈' '새뮤얼 애덤스'
'맥덕 기자' 셋이 공통으로 선택한 맥주는 체코산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 필스너 우르켈은 '오리지널 필스너'란 뜻으로, 투명한 황금빛이 특징인 필스너 라거(lager) 맥주의 원조다.〈하단 '맥주의 구분' 참조〉 오늘날 전 세계 대부분의 맥주가 이 필스너 라거에 속한다. 강 기자는 "라거도 이렇게 맛있구나 느끼게 해준 맥주"라고 했고, 채 기자는 "언제 마셔도 실패가 없는 맥주"라고 평가했다.
미국 '새뮤얼 애덤스(Samuel Adams)'와 일본 '아사히 프라임(Asahi Prime)'은 각각 두 명이 공통으로 골랐다. 두 맥주도 라거 스타일이지만 국산 맥주와 달리 밋밋하지 않고 쌉쌀하면서도 고소한 풍미가 풍부하다는 특징이 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사랑한 밀 맥주 '구스아일랜드 312'
보리(맥아)가 아닌 밀을 원료로 하는 밀 맥주는 오렌지, 장미, 바질 등 풍성한 과일·꽃·허브향으로 여성들에게 특히 사랑받고 있다. 밀 맥주 중에서는 미국 '구스아일랜드 312(Goose Island 312 Urban Wheat Ale)'가 2표를 받았다. 시카고에서 생산되는 맥주로 역시 시카고 출신인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즐겨 마신다고 알려졌다. 김 기자는 "전분을 물에 풀어놓은 듯한 미끌미끌하고 텁텁한 밀 맥주 특유의 질감을 싫어하는데, 이 맥주는 산뜻하다"고 했다.
독일 대표 밀 맥주 '바이엔슈테판 바이스비어(Weihenstephaner Weissbier)'는 전형적인 밀 맥주 맛인 '헤페(Hefe)'와 보다 깔끔한 '크리스탈(Kristal)'이 각각 1표씩 얻었다. 하와이 코나 브루잉이 생산한 '와일루아 위트(Wailua Wheat)'는 패션프루트 농축액을 첨가해 새콤한 맛이 나는 밀 맥주다.
에일과 라거 섞은 듯한 페일 에일·IPA가 대세
세 기자가 구입한 30개 맥주를 계통별로 구분하면 에일(ale)이 10개로 가장 많아 최근 인기를 반영했다. 페일 계열 중에서 페일 에일(Pale Ale)·인디아 페일 에일(India Pale Ale·IPA)이 대부분이다. 김 기자는 "한국 소비자들이 '라거는 맛없다'는 불신 때문에 에일로 쏠렸지만, 텁텁하달 정도로 진한 스타우트·포터보다는 라거와 에일의 중간쯤 되는 페일 에일·IPA를 선호하는 듯하다"고 했다.
페일 에일은 상대적으로 덜 볶아 옅은 빛깔을 띠는 맥아로 만든 에일로, 스타우트·포터 등 다른 에일보다 맑고 가벼운 맛이다. 인디아 페일 에일은 과거 식민지시대 영국 맥주업체들이 인도로 맥주를 수출하기 위해 홉(hop)을 많이 넣어 쌉쌀한 맛과 향이 강하다. 홉은 맥주 특유의 맛을 내지만 원래는 맥주가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부제로 첨가했다.
중세 수도사들이 마시던 맛 그대로, 트라피스트 맥주
맥주를 사러 마트에 간 세 기자는 "이렇게 다양한 맥주가 국내에 들어와 있는지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벨기에 베스트말레(Westemalle)·오르발(Orval) 트라피스트 맥주가 대표적이다. 베스트말레와 오르발은 가톨릭 트라피스트(Trappiste) 수도회 소속 수도원에서 아직도 중세 방식 그대로 만든다. 벨기에 6곳, 네덜란드 2곳, 이탈리아·오스트리아·미국 각 1곳 등 11곳에서 생산한다. 이 중 가장 이름난 벨기에·네덜란드 7개는 현지에서도 구하기 어렵다.
벨기에 '세종 뒤퐁(Saison Dupont)'은 겨울철에만 만드는 맥주이고, 역시 벨기에에서 생산되는 '린드만 괴즈(Lindemans Gueuze)'는 와인처럼 산미가 있어서 '사워 비어(sour beer)'라 불리기도 한다. 김 기자는 "와인처럼 음식과 두루 어울리는 맥주"라고 했다.
스코틀랜드 양조업체 테넌츠(Tennent's)에서 생산한, 위스키를 담았던 오크통에 담아 숙성시킨 맥주도 있었다. 김 기자는 "'양폭(맥주와 위스키를 섞은 폭탄주)'의 맛이 희미하게 난다"며 "과거 양폭을 즐겨 드시던 남성 분들이 선호할 듯하나 '소맥'을 주로 마시는 요즘 젊은이들 취향은 아닌 듯하다"고 했다.
맥덕'(맥주 덕후·맥주 마니아)들 사이에선 "병맥주와 캔맥주 중 어떤 게 더 맛있을까" 논쟁이 종종 벌어진다. 전문가들의 답은 "같은 맥주일 경우 캔이 낫다"는 것이다. 캔이 외부 공기와 햇볕으로부터 더욱 완벽하게 맥주를 차단해주기 때문. 알루미늄이 유리보다 열전도율이 높아 더 빠르게 차가워진다는 장점도 있다.
맥주잔을 다양하게 갖추기 힘들면 와인잔을 활용한다. 불룩한 와인잔은 안쪽 공간이 넓어 맛과 향이 풍성하게 피어오르며, 입구가 좁아 향이 흩어지지 않고 잔 안에 머무른다. 가득 채우면 맥주 향이 머무를 공간이 없어 와인잔을 쓰는 의미가 사라지니, 3분의 1 이하로 따른다. 치킨은 풍미 강한 맥주와 덜 어울린다. 페일 에일·인디아 페일 에일(IPA)에는 짭짤한 체다치즈, 스타우트·포터에는 달콤한 초콜릿, 밀 맥주는 홍합찜과 찰떡궁합이다.
맥주의 구분
맥주는 크게 에일(ale)과 라거(lager)로 구분된다.
에일 맥주는 상대적으로 높은 온도(16~24도)에서 짧게 숙성시킨다. 에일·페일 에일·인디아 페일 에일(IPA)·스타우트·포터는 물론 밀 맥주 등 대부분의 맥주가 에일에 속한다.
라거 맥주는 낮은 온도(섭씨 4~10도)에서 오래 숙성시킨다. 라거의 어원인 라겐(lagern)은 '저장하다, 묵히다'는 뜻의 독일어.
오늘날 주로 마시는 투명한 황금빛 라거는 체코 플젠(Plzen)에서 1842년 탄생했다. 플젠의 독일식 이름이 필젠(Pilsen). '필스너 라거(Pilsner Lager)' 또는 '필스너'는 플젠에서 처음 개발된 스타일의 라거 맥주란 뜻이다.
람빅(lambic) 맥주도 있다. 발효 효모를 인위적으로 첨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발효되도록 한다. '자연발효 맥주' 또는 '야생 맥주'라고도 한다. 시큼한 맛이 나 '사워 맥주(sour beer)'라 부르기도 한다. 벨기에 괴즈(Gueuze)가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