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대비 특강 90분 내내 강조된 건 '자신감'
'인상이 당락 좌우한다'…입꼬리 올리는 "개구리 뒷다리" 수십번 외쳐
올해 5월 개설된 강의도 '블라인드 채용 대비'로 간판 바꿔달아
“인상에 자신감이 없으시네요. 자세도 별로고…. ‘지역인재’이긴 한데…”
12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C학원에서 ‘블라인드 면접, 이렇게 대비하라’ 특강이 열렸다. 이날 강의에는 하반기 신입 공채를 준비하거나 경력 이직을 준비하는 10명이 참석했다.
특강 내내 강사가 강조한 단어는 ‘자신감’이었다. 학교, 학점은 물론 증명사진도 붙일 수 없는 블라인드 채용에서 가장 변별력 있는 것은 ‘면접에서 주는 인상’이라는 이유다. 강사는 수업을 시작하며 “외모나 스펙 때문에 떨어지는 일은 없다”며 “이제 중요한 것은 오직 면접”이라고 말했다. 그는 수강생으로 참여한 기자에게 “자신감이 없는 인상”이라고 평가를 내리며 수업을 충실히 따라와야 할 것이라고 겁부터 줬다.
올해 하반기부터 모든 공공기관·공기업에서 블라인드 채용이 시작된다. 입사 지원서에 출신 학교와 지역, 학점, 가족 관계, 신체 조건 등을 기입하는 항목이 사라진다. 사진도 첨부할 수 없다. 자기소개서와 국가직무능력표준(NCS), 전공 필기와 면접이 주요 평가 근거다. 배경이 아닌 실력에 따라 인재를 선발하겠다는 취지다.
일부 취업준비생들은 블라인드 채용 도입으로 공정한 기회의 문이 열렸다고 반기지만, 서류전형 관문을 뚫고 나면 맞닥드리게 될 면접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 취업준비생들의 이런 불안감을 파고들며 사설 학원들은 벌써부터 각종 ‘취업 컨설팅’과 ‘심화 면접 강의’등을 개설해 수강생을 끌어모으고 있다.
취업한 지 1년 남짓인 기자가 직접 취업준비생 시절의 절박한 마음으로 ‘공기업준비생’이 되어 학원가에 들어가봤다. 기자가 학원에 밝힌 ‘기본 스펙’은 다음과 같다. ‘28세, 지방대 국어교육과 2016년 8월 졸업, 토익 910점, 어문 관련 자격증 3개, 언론사 인턴 6개월’
“안녕하세요 지원자 ○○○입니다.” 본격적 수업에 앞서 강사는 수강생들의 발성을 점검했다. 다른 수강생들과 달리 기자가 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강사는 “처음이니 못하는 건 당연하다”며 웃었다. 그는 “우리 학원에서는 면접 대비용 기본적인 발성법을 가르치는 과정도 있다”고 설명했다. ‘블라인드 채용 대비 특강’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 수업은 90여분 대부분이 ‘목소리·이미지 트레이닝’에 할애됐다.
강의는 블라인드 채용에 대한 강의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스피치 수업이었다. ‘자신감 키우는 파워포즈’, ‘뱃심으로 말하기’, ‘호감 미소 짓는 법’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강사는 발성을 지적당한 후 기가 죽어 책상에 구부정하게 앉아있던 기자를 지적하며 ‘주눅들어 보인다’고 했다. 강사는 기자에게 자세 교정에 도움이 되는 스트레칭 동작을 알려줬다. 수강생들은 수업을 듣다 일어나 어깨를 돌리고 목을 좌우로 당겼다. 강사는 “몸이 마음을 지배한다”며 “짧은 시간의 면접에서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은 내용보단 ‘자신감 있어 보이는’ 느낌”이라고 했다.
특강은 ‘복식호흡’과 ‘미소짓기’ 연습으로 이어졌다. 수강생들은 제자리에 서서 머리가 땅에 닿게 허리를 숙인 뒤 “헛! 헛!”하고 배에 힘을 주고 ‘배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을 익혔다. 복식호흡을 통한 발성이 신뢰감을 준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으헤 으헤 으허허”를 한 음절씩 끊어서 발음하는 훈련도 했다. 익숙지 않은 몇몇 수강생이 헛기침을 하자 강의실은 웃음바다가 됐다.
강사는 양 입꼬리가 20도쯤 올라간 인상이 면접관들의 호감을 살 수 있다면서 '미소를 부르는 주문'을 욀 것을 주문했다. 수강생들은 거울을 보면서 연신 "개구리 뒷다리~"를 반복해 외치며 입꼬리 올리는 연습을 했다.
이 학원에서 블라인드 채용 대비로 최근 개설한 이 강좌는 기존에도 있던 '면접 대비 강좌'와 강의 내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1:1 면접 개인지도는 강의료가 1회 90분 수업당 20만원이지만 10회짜리 코스로 등록하면 150만원을 받는다. '올바른 발성법', '정확한 발음 트레이닝', '이목을 사로잡는 1분 자기소개 특강' 등 이전부터 진행하던 면접 대비 스피치 수업과 똑같았다. '블라인드 채용 대비'라는 설명만 추가됐을 뿐이다.
강사는 수업을 마친 뒤 특히 자신감이 떨어져보이는 수강생 3명을 골라 이 학원에서 사용할 수 있는 5만원짜리 교육상품권을 나눠줬다. 이날 특강을 수강한 한 학생은 “블라인드 시행 후에는 판단 기준도 애매한 ‘인상 평가’에도 돈을 쓰게 생겼다”며 “불안하니 어쩔 수 없이 등록을 고민하게 된다”고 푸념했다.
“블라인드 채용은 자기소개서와 면접이 전부에요. 없는 경험도 필요하면 만들어줄 수 있으니, 일단 등록하세요”
14일 찾아간 서울 종로구의 한 D취업컨설팅 학원에서는 기자에게 “불안하면 일단 등록하라”는 말부터 했다. 자신을 ‘취업코치’라고 소개한 서진명(가명)씨는 기자가 ‘취업준비도 자가진단지’에 학교명을 적자 “지방대 출신이니 블라인드 채용은 분명 기회”라고 격려했다. 기자가 ‘공기업에 취직하고 싶은데 언론사 외엔 별다른 경험이 없다’고 걱정하자, 서씨는 웃으며 “전혀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학원에서 소개하는 진로 관련 특강을 들으면 수료증이 나온다”며 “자소서에 관련 직무 경험이 있는 것처럼 녹여낼 수 있다”고 했다.
정부는 블라인드 채용에서 ‘직무 관련 경험’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D학원에서는 진로 상담을 받은 걸 직무 경험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라고 부추겼다. 더구나 대학에서 ‘진로 상담’을 전공한 강사가 대기업과 공기업, 공공부문 공채 대비반 등 모든 직군의 진로 상담을 도맡는다고 했다. 그런 강사에게 진로 상담만 받을 것을 가지고 관련 직무가 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직무·직군별로 전담 강사는 따로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서씨는 “국가직무능력표준(NCS) 문제 출제 경험이 있는 대표 코치이기 때문에 전(全) 직군 지도가 가능하다”며 “코치 밑에서 합격한 수강생만 누적 6000여명”이라고 답했다.
이날 기자가 추천받은 강의는 ‘1:1 집중 컨설팅’과 ‘자소서·면접 종합 강의’였다. 1:1 컨설팅 수업은 2시간에 34만원, 자소서·면접 종합 대비 강좌는 3주 과정에 75만원이었다. 1:1 컨설팅 수업은 ‘자기소개서 첨삭’ ‘직무 탐색’ ‘취업 전략 상담’등으로 구성됐다. 자소서·면접 종합 대비 강좌는 3시간씩 총 8회 진행된다. ‘자기소개서 첨삭’과 ‘모의 면접 진행 후 피드백’ ‘합격자 답변 분석’이 주 내용이다. 두 강의 모두 기존 면접 대비 강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D취업컨설팅 학원은 5월 문재인 정부가 블라인드 채용을 공고한 직후 ‘블라인드 채용 대비’라는 간판을 내걸고 운영하기 시작했다. 업력은 짧지만 유능한 강사가 있어 수업의 질이 높다는 게 학원 측 설명이었다. 학원 관계자는 “9월달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블라인드 채용에 대비하기 위해 학원 등록을 희망하는 학생들이 많다”며 “미리 연락 줘야 등록이 가능할 테니 꼭 금주 내로 연락을 달라”고 전했다.
학원들의 이런 영업 행태에 대해 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기우(杞憂) 장사’라고 얘기한다. 2017년 취업 준비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공기업 1위로 꼽힌 한국전력공사 인사담당 관계자는 “면접 때 말을 잘 하거나 태도가 좋다고만 해서 뽑는 경우는 없다. 면접을 진행하다보면 ‘진짜 인재’는 드러나기 마련”이라며 “지원자가 해당 직무에 대해 얼마나 오래 고민하고 준비했는지가 중요 평가 요소이므로, 눌변이라고 걱정하기보다 회사와 직무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