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고혈압과 부정맥으로 정기적으로 병원에 오던 80대 환자가 열이 나며 몸살 기운이 있고 자꾸 붓는다고 했다. 진찰해보니 빈혈인 것 같아 혈액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환자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나온 무료 건강검진을 받을 때가 되었다며 그쪽에서 검사를 해보겠다고 했다. 우리 병원에서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실시하는 건강검진을 하지 않아 검사를 하려면 따로 돈이 든다. 환자 상태를 봐서는 당장 혈액 검사를 해보고 싶었으나 그렇게 설득하자니 장사꾼 같은 생각이 들어 되도록 빨리, 반드시 검사를 해보시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다. 환자는 그 후 몇 개월간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최근 다시 찾아온 환자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나에게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아 먹었는데 증상이 좋아져 혈액 검사를 미뤘다고 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다가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 넘어졌고, 119구급대를 불러 큰 병원에 갔더니 12g/㎗ 이상이 정상인 혈색소 수치가 절반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이렇게 심한 빈혈로 판정받아 입원한 뒤 수혈도 하고 원인을 찾으려고 이 검사 저 검사 해 본 결과 위궤양 때문이었다. 거의 한 달 만에 퇴원했다고 했다.
'그냥 내가 검사를 해볼걸'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버스는 이미 지나갔고 그나마 환자가 큰일 당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환자는 내가 검사하자고 했을 때 그냥 했더라면 수혈이나 입원은 하지 않았을 거라며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은 셈이라더니 우리 병원에서도 공단 검진을 하라고 성화였다.
속이 아프다고 왔던 또 다른 환자는 위염에 준하는 치료를 몇 주간 받았지만 증상이 계속돼 내시경을 해보자고 했다. 이 환자 역시 올해 공단 검진에 내시경이 포함돼 있다며 빨리 받겠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1주일 후 검진을 받았다. 내시경으로 발견한 위궤양은 조직 검사에서 악성으로 나와 비교적 조기에 수술을 받아 완치될 수 있었다. 빈혈 환자와 위궤양 환자 모두 올해 공단 검진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의사의 의견을 경청하고 실천한 환자는 좋은 결과를 얻었고 흘려들은 환자는 큰일 날 뻔했다.
우리 병원에서 위 내시경 검사를 하는 일은 드물다. 국민건강공단 무료 검진에 내시경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환자들은 "곧 공단에서 무료로 할 거예요" 또는 "지난달 공단 검진 때 했어요"라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 병원의 내시경은 거의 개점휴업 상태다.
휴가철에 건강검진을 받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우리 병원에서는 왜 건강검진을 하지 않느냐는 문의가 종종 있다. 주변에도 검진을 하는 의원이 많기에 더 그런 모양이다. 건강검진을 하려면 충분한 공간과 시설 그리고 인력이 필요하다. 또 진료 담당 의사와 검진 담당 의사가 따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료와 검진을 같이 하다 보면 시간에 쫓기게 마련이고 결국 오진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처럼 개인 의원이 순전히 원장 개인 능력에 좌우되는 경우에는 검진 환자가 꾸준히 찾아와야만 시설과 장비, 인력을 유지할 수 있다. 충분한 환자 수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의사는 병원 유지를 위해 쓸데없는 검사를 권할 우려가 있다. 의사는 환자에게 진심으로 말하지만(적어도 내 경우에는), 환자는 의사를 색안경 끼고 본다. 이것이 아마도 의사라는 직업의 영원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