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이수환(29)씨는 얼마 전 자신의 흰색 아반떼 문짝에 아이언맨 캐릭터 스티커를 붙였다. 무늬도, 장식도 없는 자동차 외관이 영 심심해 보여 작은 스티커로 포인트를 줬다. 이씨는 "매일 운전을 하다 보면 똑같은 색깔과 디자인의 자동차만 보게 돼 지루하다"며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흰색 차에 젊은 개성을 더하는 안전하고 손쉬운 수단이 스티커"라고 했다.
밋밋한 회색 도로에 젊은 세대가 '작은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한국은 무채색 차량이 80% 이상이고, 자동차 튜닝 시장은 규제가 엄격해 그 규모가 일본의 30분의 1 수준이다. 그만큼 독특한 자동차를 찾아보기 힘들다. 개성과 취향을 드러내는 데 익숙한 젊은 세대 사이에서 스티커로 차량 구석구석 꾸미는 '스티커 튜닝'이 인기를 끄는 이유다.
예전엔 '초보 운전' '아기가 타고 있어요' 같은 문구를 뒷유리에 붙이는 정도였다. 요즘은 문짝, 보닛, 지붕, 트렁크, 주유구, 백미러, 핸들 등에 붙이는 각양각색 스티커가 쏟아져 나온다. 크기와 재질에 따라 3000~7만원 선. 특정 부분만 빨강·파랑 등 선명한 색으로 바꾸는 시트지 스티커가 가장 인기다.
시선을 붙잡는 과감한 아이디어 스티커도 많다. 창문 너머 보이는 운전자 얼굴 아래 몸통 모양 스티커를 붙이거나, '군자소기위이행(君子素其位而行·군자는 자신의 처지와 본분에 맞게 행동할 뿐 그 밖의 것은 바라지 않는다)' 같은 문구로 인생관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고로 파손된 부분을 무늬처럼 보이게 하는 스티커도 있다. 긁히거나 찌그러진 자국 옆에 만화 캐릭터가 칼을 휘두르는 스티커나 총알 스티커를 붙이고, 깨진 창문 옆에 야구공 스티커를 붙이는 식이다.
'스티커 튜닝'의 인기는 최근 세계적 유행이 된 '슬로건 패션'과도 연관돼 있다. 가치관이나 정치적 견해를 옷에 노골적으로 적어 입고 다니는 것처럼, 도로 위에서도 스티커를 사용해 불특정 다수를 향한 정치적 의사 표현을 하는 것이다. 책 '범퍼 스티커로 철학하기'(민음인)를 쓴 미국의 철학자 잭 보웬은 "트위터가 있기 전에 범퍼 스티커가 있었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동차 스티커를 정치 표현 수단으로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2008년 대선 당시 버락 오바마는 '희망과 변화(Hope and Change)'라는 선거 슬로건을 범퍼 스티커로 제작해 배포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지지자들도 '가짜 뉴스에 맞서 싸우자(Fight the Fake News)'라는 스티커를 차에 붙이고 다닌다. 국내에서도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 스티커나 위안부 관련 평화의 소녀상 스티커가 차량용으로 제작됐다. 하성용 신한대 자동차공학과 교수는 "국내 자동차 튜닝은 규제가 아직 까다로운 편에 속하고 승인받는 절차도 복잡하다"며 "스티커에 대해서는 규제가 없지만, 스티커로 자동차 번호판을 가리거나 빛을 반사하는 재질의 스티커로 다른 운전자 시야를 방해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