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운전사'는 평론가들의 낮은 별점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눈물을 뽑아내며 기어이 흥행 중이다. 송강호는 이번에도 또 천만영화의 주인공이 되는가 보다. 이제는 영화 자체의 작품성 여부와 상관없이, 어쨌든 송강호가 울면 관객도 운다. 그의 눈물은 어느 샌가 대한민국 소시민의 눈물을 대표하고 있다.
영화 '택시운전사'는 철저히 서울사람의 눈으로 보는 1980년 광주를 그렸다. 김만섭은 '공부하라고 대학 보내놨더니 데모나 하고 앉았고' 레파토리를 수시로 늘어놓는 평범한 중년의 택시운전사다. 사별한 아내 사이에 낳은 딸 하나 잘 키우려고, 그래도 웃는 낯으로 손님을 대하며 열심히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가난한 가장이다. 그런 그가 돈 십만원을 벌겠다고 저도 모르게 80년 광주 한복판으로 들어선 것이다.
영화는 철저히 은폐되었던 광주의 진실을 필름에 담아 전세계에 내놓은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의 실화를 다뤘다. 그를 광주에 데려다 준 김사복이라는 택시운전사는 실제로는 결국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김만섭이라는 인물로 영화 안에서나마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송강호의 모습을 하고서 말이다.
광주의 시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길 위에서 자신의 생사가 졸지에 갈리는 참상을 보는 것은 3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힘겨운 일이다. 영화 '택시운전사'처럼 외부인의 시선으로 참사의 현장 언저리를 겉돌 뿐인데도 분노는 덜해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아내이며 자식이었을 평범한 시민들이, 그 자신이 낸 세금으로 무장한 공권력에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은 인간적으로 순수한 분노를 불러 일으킨다.
참사의 한 가운데에 뛰어들지 못한 채 겉에서 간신히 카메라를 갖다 댔을 뿐인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며 이 어처구니 없는 역사에 내내 원통해 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절실해지는 게 한 가지 생긴다. 바로 김만섭은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송강호는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송강호를 극장에서 본 관객이 1억명이 넘어가는 동안, 송강호라는 존재는 대다수 관객의 시선·입장·감정을 차츰차츰 대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니, 거꾸로 관객들이 송강호가 맡은 역할에 적극적으로 감정을 이입해 영화 속 캐릭터에 동화된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송강호와 관객은 점점 더 서로를 동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조폭영화에서 맛깔나는 조연으로 이름을 알렸던 송강호가 어느덧 소시민의 눈물을 대신 흘리기까지 어떤 영화들이 그를 거쳐갔을까. 영화 '괴물'의 조금 모자란 현서의 아버지, '우아한 세계'의 짠하디 짠한 기러기 아빠에 이어 '사도'에서는 아들을 죽음으로 몬 엄격한 왕이자 비틀린 아버지.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아비로 살아간다는 것'의 다양한 버전을 송강호의 여러 영화를 통해서 목격하고 있다. 하지만 캐릭터나 직업 등이 다 다른 역할들이지만, 모두 누군가의 아버지라는 것만큼은 통한다. 삶의 애환을 숨기고 천연덕스럽게 웃고, 별로 세지도 않으면서 센 척하고, 마음 속 사랑을 전하는 데 서툴러서 모진 말이나 내뱉고선 뒤돌아 우는 모습들이 어찌나 다 비슷한지.
한강다리를 달리며 "현서야"를 부르짖는 울음(영화 '괴물')과 아들이 들어있는 뒤주를 부여잡고 통곡하는 왕의 울음(영화 '사도')이 얼마나 다를까. 왕위를 두고 벌이는 잔혹한 피의 역사에 휘말려 졸지에 아들을 잃고 텅 빈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아비의 무기력한 눈물은 또 어떤가(영화 '관상').
무엇보다 기억에 남았던 송강호의 눈물은 '우아한 세계'에서 기러기 아빠인 주인공 강인구가 라면을 먹다가 흘렸던 눈물이다. 캐나다에 있는 아내와 딸이 그곳에서의 생활을 찍어 보내준 영상을 보면서 미소 짓다가 별안간 먹던 라면을 집어 던지며 우는 울음. 그 라면을 또 주섬주섬 치우면서 우는 울음. 소름 끼치게 현실적인 페이소스다.
우리의 아버지는 권력자이거나 특권층, 혹은 졸부이기 보다는 대부분 소시민이다. 굉장히 흔하고 식상한 데다 약간은 하대하는 뉘앙스마저 풍기는 '소시민'이라는 용어는 나와는 상관없는 말 같지만 사실 송강호의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관객들은 소시민에 속한다. 그리고 현실의 팍팍함을 묘하게 반영하고 있는 송강호의 캐릭터에 어느 새 동화되고 만다.
그러니 송강호는 영화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것이 곧 관객의 생존이며 소시민의 생존이기 때문이다. '택시운전사'에서 '광주의 진실'을 살려 돌려보내야 하는 것만큼 절실했던 것이 김만섭의 목숨이었다. 딸의 핑크색 구두를 옆에 두고 울면서 광주로 돌아가는 김만섭을 보며 관객들은 애타게 마음으로 외친다.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고.
영화 '택시운전사'는 그 참혹했던 광주의 금남로를, 슬로모션을 상당 부분 쓰면서까지 비장하고 처연하게 담아내었다. 하지만 실제 그 거리에서 벌어진 참황에 얼마나 다가갔는가라고 묻는다면 아주 소극적인 접근이었다고 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영화는 80년 광주의 중심으로 휘말려 들어가지 못한다. 계속 겁에 질린 채 겉돌기만 하는 것이 답답할 정도다. 따라서 '택시운전사'는 역사를 다룬 영화로서는 기량을 맘껏 발휘하지 못한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역사영화가 실제의 진실에 채 다가가지 못한 채 머뭇거리는 그 사이를 송강호라는 대배우의 눈물이 채우고 있다. 그래서 관객은 그 진실에 심정적으로나마 가까스로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송강호라는 배우가 갖는 힘은, 관객과 동화되는 상호작용이 그 어떤 배우보다 강력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그가 어떤 영화들에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는 그 경우의 수가 무궁무궁하지만 적어도 '택시운전사' 같은 영화에서 송강호는 누군가의 아버지이거나 남편이거나 아들이다. 그 친숙한 느낌을 관객들이 가장 먼저 알아차릴 수 있다. 소시민을 대표하는 배우. 송강호가 흥행 배우로서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일 것이다. 우리는 아주 소중한 배우를 갖고 있는 것이며, 송강호의 천만 영화 리스트는 앞으로 몇 개 더 추가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