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복더위가 절정이던 1962년 8월 12일 낮, 해운대·광안리 등 부산의 해수욕장 상공에 비행기 한 대가 나타났다. 저공비행을 하던 비행기는 폭격이라도 하듯 깨알처럼 많은 물체를 백사장의 피서 인파 위로 투하하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그건 치약이었다. 모 업체가 신제품 홍보를 위해 뿌린 것이었다. 20여만 명의 피서객이 공짜 선물을 줍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가 났다.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진 치약은 2만5000개나 됐다. 요즘 이랬다가는 사람들이 약간 놀랄 수도 있지만, 1950~1960년대 한국인에겐 창공의 비행기가 땅으로 뭔가를 살포한다는 게 그렇게 낯선 일은 아니었다. '간첩을 신고하자'는 등의 계몽 전단에서부터 '대통령 후보 ○○○을 지지한다'는 선거 홍보물에 이르기까지 '전단(삐라)'이 수시로 비행기로 살포되던 시대였다. 오늘 같으면 이메일이나 소셜 미디어로 할 일을 비행기가 했다. 어린이날 기념 퀴즈 대회 때 문제지 수십만 장을 공군기로 살포한 적도 있다. 1968년 1월 9일 충무공 '난중일기' 절도범이 부산에서 잡혔을 때도 조선일보는 되찾은 국보와 범인의 사진을 아침 신문에 싣기 위해 전용 비행기 '제비호'를 띄워 서울~부산을 왕복했다.

1961년 여름 서울시 전역에 살충제‘말라티온’을 공중 살포하는 모습을 보도한 기사. 신문사 옥상에서 촬영했다는 사진에서는 공군 비행기가 빌딩을 스칠 듯 저공비행하며 중구 소공동 일대에 뿌연 약을 뿌리고 있다(경향신문 1961년 7월 11일자).

이것저것 공중 투하를 하다 보니 사고가 없을 수 없었다. 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56년 4월 마산에선 이승만 지지 선전지를 비행기로 살포하다가 실수로 선전지 한 뭉치의 끈을 풀지 못하고 떨어뜨리는 바람에 가정집 지붕과 천장이 뚫렸다. 더 위험천만했던 건 농약·살충제의 살포였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당국은 전염병을 예방하고 모기, 파리 등 해충을 박멸한다며 DDT, 말라티온은 물론 현재는 사용이 금지된 파라티온 같은 맹독성 농약까지 비행기로 시내에 뿌려댔다. 엔진 굉음과 함께 서울 상공에 나타난 공군기는 저공비행을 하며 베트남전 현장에 고엽제를 뿌린 미군처럼 안개비 같은 농약을 뿌리고 사라졌다. 시민들은 코끝을 찌르는 약 냄새를 좋든 싫든 맡아야 했다.

1963년의 경우, 서울시는 8월부터 10월까지 매주 금요일 오후 5시 시내 전역에 살충제 말라티온을 비행기로 살포했다. 한 번에 1800갤런(약 6814L)씩이나 뿌렸다. "집집마다 장독이나 물통을 덮으라"고 알리긴 했지만, 뚜껑을 덮는 정도로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는 살충제를 꼼짝없이 맞아야 했던 시민들은 치명적 위험에 노출됐다. 양잠 농가의 누에나 꿀벌, 나비 등 익충(益蟲)의 피해가 속출하고 천연기념물 왜가리도 떼죽음 당했다. 전문가들은 "살충제의 공중 살포는 돈과 노력만 많이 들어갈 뿐 해충 박멸 효과는 크지 않다"고 지적했지만 '전시 효과'가 확실했기 때문인지 당국은 이를 쉽게 중단하지 않았다. 1974년 여름 부산 화학공장 화재 때 일부 직원이 발화 초기에 매캐한 냄새를 맡고도 '소독약을 공중 살포하는 줄 알고' 계속 일했을 정도로 약품의 공중 투하는 일상화되어 있었다(동아일보 1974년 8월 9일자).

이제 공중에서 뭔가를 다중에게 뿌리는 일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다. 집채만 한 프로펠러 비행기가 맡았던 농약 살포는 헬기의 몫으로 바뀌었다가, 요즘은 드론(무인기)으로 뿌린다. 농약·비료의 살포는 드론의 가장 큰 시장으로 떠올랐으며 관련 업체가 40여 곳에 이른다고 한다. 사격에 빗대면 무차별 난사하며 총알을 낭비하다가 저격총으로 필요한 목표만 정밀 타격하는 셈이니, 공중 살포 테크놀로지의 경이적 진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