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 천직인 줄 알았다. 지금은 스크린 위에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일에 자신을 던지고 있다. 13일 개봉하는 픽사 애니메이션 '카3'의 주연 캐릭터를 개발한 김재형(44)씨는 의사 출신 애니메이터다. 연세대 의대를 나와 서울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했다. 어릴 적부터 꿈꿔온 만화영화 만드는 사람이 되기 위해 보장된 미래를 훌훌 털어내고 2003년 미국으로 떠났고, '꿈의 직장' 픽사에 탄탄히 자리 잡았다. 많은 한국계 인재가 할리우드 메이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일하지만, 김씨처럼 전혀 다른 직종에서 옮겨와 성공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사진 스튜디오에서 만난 그는 "어찌 보면 무모했지만, 그때는 내 길 아닌 걸 접고 새로운 길을 선택하고 싶었다"고 했다. "'조금만 참아라, 레지던트만 끝나면 병원 차려 돈 벌고…' 그런 얘기가 제일 싫었어요. 직업의 가치는 내가 정하는 것이고, 내 손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었고요."
샌프란시스코의 '아카데미 오브 아츠 유니버시티'를 나와, '스타크래프트 2' 개발에 참여했던 게임회사 '블리자드'를 거쳐 픽사까지, 꿈을 향한 자기 확신을 스스로 증명해온 미국 생활이 어느덧 15년째. 서른셋 나이에 미대를 갓 졸업한 20대 초반 미국 청년들과 함께 인턴 생활을 시작해 한 계단씩 올라섰다. 블리자드는 "좀 놀아도 보고 사고도 쳐본 친구들이 모인 듯한 곳"이었고, 픽사는 "맨날 반에서 1등 하던 친구들이 모여 체계적으로 일이 진행돼 배울 게 많은 일터"였다. 그는 "돌아보면 후회되는 건 딱 한 가지, 이 일을 너무 늦게 시작했다는 것뿐"이라고 했다.
'몬스터 대학교'(2013), '인사이드 아웃'(2015), '굿 다이노'(2016) 등 전 세계 박스 오피스를 주름잡은 픽사의 흥행 애니메이션마다 그의 인장이 찍혀 있다. 스튜디오 애니메이션에서 애니메이터의 역할은 "가상의 배우 하나를 새로 창조해내는 것"이다. "글과 스케치로 만들어진 캐릭터에 눈의 움직임이나 입모양 같은 표정 변화, 성격을 드러내는 몸짓과 태도까지 부여하는 거죠." 아들(15)과 딸(8)은 그 작업을 돕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몬스터 대학교' 땐 털북숭이 덩치 괴물 '설리'의 움직임을 표현하려 아들과 뒷산에 올라가 풀숲을 헤치며 뛰어 내려오는 장면을 찍어서 참조했고, '인사이드 아웃'에서 주인공들이 '기억 구슬'을 뺏으려 티격태격하는 장면도 아이들이 먼저 연기해준 덕분에 생생한 연출이 가능했다. "제가 참여한 새 영화를 보러 가면 아이들이 툭툭 치며 말을 건네요. '아빠, 저거저거 우리가 찍은 거야' 하면서. 하하!" 그는 "'굿 다이노'에서 긴 목 공룡의 움직임 같은 걸 표현할 때는 의대에서 배운 해부학 지식도 도움 되더라"며 웃었다.
'카3'에선 주인공 자동차 '라이트닝 맥퀸'의 라이벌이자 신세대 경주차 챔피언인 '잭슨 스톰' 캐릭터가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일루미네이션의 신작 '수퍼 배드 3'와 함께 여름 만화영화 시장을 양분할 기대작이다. "어느 나라나 취업난이잖아요. 젊은이들이 난관을 극복하고 꿈을 이루는 이야기이자, 앞선 세대가 멘토가 돼 신세대를 끌어주는 화해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죠. '카' 시리즈의 특징인 레이싱 액션도 더 화려해져서 남녀노소 모두 좋아할 거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