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 모자를 쓴 92회 피티워모 참석자들. 슈트와 매치하면 경쾌하고 여유로운 느낌이 난다.

매년 1월과 6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리는 피티 워모(Pitti Uomo)는 남성 패션의 유행이 어디로 흘러갈지 가늠하는 풍향계다. 세계 최대 남성복 박람회로 통하는 행사엔 전 세계에서 온 남성복 브랜드 관계자와 바이어 등 3만명 넘게 모인다. 가장 잘 입는 남자들이자, 가장 가까이에서 소비자를 접하는 '선수'들인 만큼 이들의 옷차림은 그대로 트렌드가 되곤 한다.

지난달 막을 내린 92회 피티 워모 참석자들의 옷차림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모자였다. 한동안 피티 워모를 풍미했던 화려한 색이 퇴장하고 그 자리에 모자가 등장했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올해 피티 워모의 남자들은 일제히 모자를 썼다. 우리말로 밀짚모자 또는 맥고(麥藁)모자라 하는 여름용 모자로 영어로는 '파나마 햇(Panama hat)'이라고 부른다.

옥스퍼드 사전에서는 파나마 햇을 '지푸라기(straw) 따위로 만든 챙 넓은 남성용 모자. 본래 열대지방의 특정 야자나무과 작물로 만든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남미에서 자라는 토키야(toquilla)라는 나무에서 추출한 섬유를 꼬아서 만든다. 모자 하나를 만드는 데 하루, 정교하고 섬세한 최고급품의 경우 8개월까지도 걸린다고 한다.

파나마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이 모자의 원조는 에콰도르다. 20세기 초반 파나마 운하 건설 노동자들이 즐겨 쓰면서 이름에 파나마가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8년 5월 23일자 조선일보엔 '파나마 모자 1만여타(打)를 에쿠아돌(에콰도르)에서 전량 수입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에콰도르 토키야 밀짚모자 전통 공예'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돼 있다.

우리 선조들이 '의관(衣冠)을 정제한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구에서도 모자는 품위 있는 신사라면 마땅히 갖춰야 하는 규범에 속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 이후부터 차츰 실용적 의미를 잃고 사라지게 된다. 이제 모자는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며 중후한 멋을 내는 아이템이 됐다.

파나마 햇은 펠트(모직물의 일종)로 만드는 겨울 모자에 비해 한결 가벼운 느낌이어서 슈트는 물론 캐주얼에도 잘 어울린다. 피티 워모의 남자들도 다양한 옷차림에 파나마 햇을 매치했다. 셔츠 바람에 모자를 써서 좀 더 갖춰 입은 느낌을 주기도 하고, 반대로 넥타이까지 갖춘 더블 브레스티드 블레이저에 숨통을 틔워주는 소품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여름 소재인 시어서커 슈트에 이 모자를 써서 청량감을 끌어올린 차림새도 눈에 띄었다.

시원한 바람이 솔솔 통할 것만 같은 파나마 모자는 휴양지 패션으로도 손색이 없다. 평소 이 모자를 쓰는 게 영 부담스럽다면 올여름 휴가 때 시도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자유로운 기분이 한껏 살아나는 경험을 하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