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장∙광고∙할인 없는 3無 경영으로 패션업계 혁신 기업으로 부상한 에버레인
원가, 하청 공장까지 모두 공개… 원자재 가격 떨어지면 판매가도 즉시 인하
판매 수익 어디에 쓰는지 까지 공개… 소비자 참여 유도
터무니없는 가격 환상 깨고 투명성과 정직성으로 합리적 소비자 열광
패션기업 아닌 픽사와 애플이 벤치마킹 모델
여름을 맞아 패션 유통가가 일제히 할인에 돌입했다. 최대 70%까지 내려간 파격적인 할인가에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넣다 보면 문득 이 옷의 실제 원가가 얼마인지 궁금해진다. 대체 원가가 얼마길래 이렇게 할인을 하는 걸까?
온라인 패션업체 에버레인(Everlane)은 이런 궁금증을 해소해 준다. 에버레인은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부풀려 판매되고 있는 패션 시장에 반기를 들고 고급 원단과 안전한 공급처, 투명한 원가 공개 등을 내세워 기존 패션기업들을 위협하는 차세대 패션기업으로 부상했다.
에버레인의 매출은 2013년 1,200만 달러(137억 원)에서 2015년 5천만 달러(약 570억 원), 2016년 1억 달러(약 1,145억 원)로 꾸준한 성장세를 보인다. 기업가치는 2억5000만 달러로 추산된다. 안젤리나 졸리, 테일러 스위프트, 제시카 알바 등 유명 셀러브리티들이 에버레인의 제품을 착용하는 모습이 노출되면서 국내에서도 직구 등을 통한 거래가 늘고 있다.
◆ ‘급진적 투명성’ 원가, 생산과정 모두 공개… 7년 만에 매출 1100억 원
2010년 벤처캐피탈에 다니던 마이클 프레이스먼(Michael Preysman)은 우연히 50달러짜리 티셔츠의 원가가 7.5달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고쳐야겠다는 생각에 에버레인을 창업했다.
그가 내세운 원칙은 ‘급진적 투명성(Radical Transparency)’이다. 그는 생산 과정부터 가격 결정까지 모든 과정을 낱낱이 공개했다. 그리고 온라인 유통을 고수하고, 광고와 마케팅 비용을 최소화해 가격을 낮췄다. 기존의 의류업체가 생산원가의 4~8배로 판매가격을 책정하는 것과 달리, 에버레인은 평균 2배수로 판매가격을 매겼다.
에버레인 웹사이트의 ‘박스-컷 티 드레스’의 상품 페이지에는 “우리는 고객이 제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문구와 함께 ‘진짜 원가(True Cost)’가 상세히 설명돼 있다. 이에 따르면 원재료비가 4.79달러, 인건비 3.7달러, 관세 98센트, 운송비 50센트로 총 원가는 10달러 정도다. 에버레인은 여기에 이윤 15달러를 더해 판매가를 25달러로 책정했다. 가격 옆에는 전통적인 소매업체에서는 50달러에 판매한다는 도발적인 문구도 첨부했다.
'베트남 호치민에서 만들어졌다'는 원산지 표시 문구를 클릭하면 공장에 대한 자세한 내용도 볼 수 있다. 공장의 위치는 물론 사장의 이력, 직원 수와 근무환경까지 모두 공개된다.
프레이스먼은 한 인터뷰에서 "모든 소비자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어디에서 어떻게 온 것인지 잘 모른다. 사람들은 점점 이 옷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과정에 대해 알기를 원한다"고 말한 바 있다.
원가에 따라 판매가는 변동한다. 물론 원자재 가격이 내려가면 판매가도 내려간다. 2012년부터 125달러에 팔았던 캐시미어 스웨터의 경우, 지난해 캐시미어 가격이 16% 하락하자 이를 반영해 100달러로 가격을 낮췄다. 에버레인은 회원들에게 보낸 메일에서 이렇게 밝혔다. “기업들은 원자잿값이 오르면 제품값을 올리지만, 원자잿값이 떨어졌을 때는 제품값을 내리지 않는다. 이는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 양보다 질 추구하는 ‘슬로우 패션’… 밀레니얼 소비자 열광
원가가 얼마인지, 생산지가 어디인지 아는 것은 농산물에서는 당연했지만, 패션계에선 오랫동안 거론되지 못했다. ‘패션은 단순히 입는 것을 넘어 환상을 주는 것’이라는 정의가 심어졌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비정상적이고 비윤리적인 과정이 공공연하게 자행됐다. 여기에 빠르게 싼 옷을 파는 패스트 패션이 정착되면서, 이윤을 극대화한 패션업계의 운영방식이 논란이 됐다.
에버레인은 이러한 패션업계의 관행에서 벗어나 비즈니스의 혁신을 시도했다. ‘양보다 질’을 추구하는 슬로우 패션을 신조로 수준 높은 의류 공장을 선별했다. 의류는 베트남, 가죽 가방은 스페인, 가죽 신발은 이탈리아에서 생산하는 식이다. 그리고 웹사이트에 깨끗한 공장 사진과 함께 이 공장과 언제 인연을 맺었는지, 공장장은 어떤 사람인지, 직원 수와 근속기간, 근무환경 등을 모두 공개했다
에버레인은 2012년 미국의 최대 세일 축제인 블랙프라이데이에는 합리에 어긋나는 소비에 동참할 수 없다며 휴업을 선언했다. 2014년, 블랙프라이데이 행사 참여를 재개했는데, 이 기간에 판매된 수익금을 협력업체 근로자들을 위한 근무환경 개선을 위해 사용했다.
당시 에버레인은 회원들에게 보낸 메일에서 “올해는 합리적 소비를 실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했다. 오늘 하루 수익금으로 중국 항저우에 있는 협력공장 직원 320여 명과 가족들에게 실외 농구장과 여가시설을 지어주려고 한다. 3만 달러를 목표로 하는데, 이에 동참할 고객을 기다린다”고 밝혔다. 이 사실은 SNS를 통해 빠르게 퍼졌고, 이날 수익은 목표액의 네 배에 가까운 11만3천 달러를 기록했다. 진정성 있고 독창적인 취지에 밀레니얼 소비자들이 열광한 것이다.
◆ 구글, 애플 비즈니스 모방… 10년 후에도 입을 수 있는 옷 만든다
가격이 싸다고 해서 품질이 낮은 것은 아니다. 에버레인은 고품질의 제품을 싸게 파는 것을 원칙으로, 기본에 충실한 간결한 다자인을 채택하고 고급 원단을 사용해 양질의 제품을 만들고 있다.
이를 위해 에버레인은 기존의 의류 회사가 아닌 픽사, 구글, 애플의 비즈니스 방식을 모방했다. 보통의 의류 회사는 디자이너와 상품기획팀이 분리돼 있어, 디자이너가 컬렉션을 만들면 상품 기획자가 판매 가능한 상품을 선정한다. 하지만 에버레인은 이를 통합해 디자이너가 고객을 이해하도록 했다. 이는 실제 제작자가 영화 제작을 총괄하는 픽사의 모델을 따온 것이다.
또, 한번 출시한 제품은 마치 애플이 아이폰이나 애플 워치를 출시할 때처럼 고객의 의견을 반영해 반복적으로 수정 작업을 거쳐 개선한다. 이에 대해 프레이스먼은 "우리는 10년 후에도 착용할 수 있는 시대를 초월한 제품을 만들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지속가능을 환경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훌륭한 품질의 옷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에버레인은 처음 시장에 등장했을 때 ‘차세대 제이크루’라는 별명을 얻었다. 1980년대 론칭한 제이크루는 고급 브랜드 못지않은 디자인에 합리적인 가격으로 인기를 끌었다. 한때 미셸 오바마 전 미국 영부인이 공식 석상에서 입고 나와 상승세를 탔지만,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지 못한 나머지 현재는 파산 직전의 단계까지 갔다. 반면 에버레인은 매년 2배 이상의 성장을 이루고 있으니, 세대교체는 시간 문제가 됐다.
최근 국내에서도 원가 공개를 내세운 패션 스타트업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하고, 칸투칸 등 투명성을 앞세운 패션 기업들이 선전하는 이유는 온라인과 SNS의 활성화로 정보에 대한 접근이 쉬워지면서 똑똑한 소비가 늘었기 때문이다. 라벨 인사이트의 조사에 따르면 40%에 달하는 소비자들이 ‘현재 선호하는 브랜드에서 더 많은 투명성을 제공하는 브랜드로 전환할 것’이라고 답했다. 이에 따라 앞으로도 투명성은 패션 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도구로 작용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