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영화에 '이야기'가 돌아왔다
글도 쓰는 출판사 사장 '봉완'(권해효)은 회사 직원 '창숙'(김새벽)과 그렇고 그런 사이. 헤어진 그녀가 회사를 그만둬 괴로웠는데, 이를 눈치챈 아내가 출판사로 달려와 마침 처음 출근한 새 여직원 '아름'(김민희)의 따귀를 날린다. 남편의 불륜 상대로 오해한 것. 그만두겠다는 아름을 달래며 소주를 마시는 저녁 자리, 옛 애인 '창숙'이 돌아오면서 모든 게 꼬여간다.
6일 개봉하는 홍상수(57) 감독의 21번째 영화 '그 후'는 그의 영화에 '이야기'가 돌아왔음을 알리는 좋은 징조다. 아쉬웠던 드라마적 재기(才氣)가 은근하다. 자기 복제적 불륜담, 관객의 동의를 구하는 듯한 태도, 스캔들 당사자인 김민희(35)의 출연으로 홍상수의 최근작들은 일종의 '사건'처럼 다뤄졌었다.
영화는 '회한(悔恨)'이라 할 만한 어떤 순간을 절제된 흑백 화면 위에 붙잡아낸다. 거기엔 일정한 진심이 있다. "그만두겠다는 나를 당신이 붙잡지 않았느냐"며 다그치는 아름 앞에서, 봉완은 "화난 네 마음을 받아준 것뿐"이라고 정당화하다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허위, 거짓말, 자가당착으로 쌓아 올린 인생 때문에 가장 지친 건 그 자신일지 모른다. 지우개로 지워도 연필로 꾹꾹 눌러쓴 자국은 남듯,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흉터다.
김민희의 연기는 천연덕스러워 더 그녀답다. 눈 내리는 밤, 열린 택시 창밖 가로등 불빛이 그녀 얼굴을 끊어질 듯 이어가며 비추는 장면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어쩌면 '그 후'는 습관적 망각을 질병처럼 앓는 '죄인'들을 위한 영화다. '망각'과 '참회'를 면죄부라 여기는 의도된 착각이야말로 '죄인'이 살아남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홍상수 '그 후' 3색 캐릭터 예고편 공개…7월 6일 개봉]
공허한 고담준론과 뻔뻔한 '자기 변명'
홍상수 영화엔 노동(勞動)이 없다. '그 후'도 마찬가지다. 문학평론가이자 출판사 사장인 '봉완'이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책을 읽거나, 직원들이 점심식사 하러 가기 전 잠시 컴퓨터 작업을 하는 장면을 제외하면 일은 지극히 주변적인 행위로 내몰린다.
언제나 그렇듯 등장인물들은 탕수육과 닭볶음탕을 안주 삼아 밤낮으로 술 마시며 넋두리를 늘어놓거나 신세 한탄을 한다. 좋게 말하면, 일탈하거나 유영(游泳)하는 방랑자들이고, 나쁘게 말하면 예술가연(然)하면서 공허한 고담준론(高談峻論)과 신변잡기를 늘어놓는 한량이다.
피사체를 좌우로 훑어나가다 대사를 하는 등장인물에게 바짝 다가가는 홍상수식 카메라 움직임은 이번 영화에서도 반복된다. 대화를 나누는 등장인물들을 관조하듯 바라보는 정적(靜的)인 흑백 화면 역시 마찬가지. 문제는 형식이나 내용 모두 지독할 만큼 자기 반복이 많다는 점이다. 옛 출판사 직원 '창숙'과 불륜에 빠졌다가 아내에게 들통나는 바람에 궁색한 변명거리를 찾는 출판사 사장이라는 이야기 구조는 홍상수 영화의 징표(徵標)에 가깝다.
관객은 불가피하게 홍 감독과 배우 김민희의 '혼외(婚外) 열애'를 떠올린다. 홍 감독의 처지를 반영하는 듯한 출판사 사장을 일방으로 감싸거나 변호하지 않고, 통렬한 야유를 퍼붓는다는 점이 영화의 극적 재미를 끌어올리긴 한다.
하지만 홍상수 영화 특유의 '자기 언급(self-reference)'은 이번 작품에서 자칫 독약이 될 수 있다.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스스로 허물거나 흔드는 탓이다. 이번 영화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형용사가 바로 '뻔뻔하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