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뿔도 녹일 기세의 땡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지난 18일 전북 남원시 운봉읍. 명창은 저물녘 부채만 들고 무대에 올랐다. 동편제마을 국악축제로 시끌벅적하던 동네가 아주 잠깐 정적에 잠겼다. 안숙선(68)은 500여 관객의 눈과 귀를 단숨에 낚아챘다.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로 정감을 나누더니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으로 아기자기하게 사랑을 노래했다. 곧이어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로 밝게 넘어갔다. 이 도령이 '너도 나를 좀 업어다오' 하는 대목이다. 배역은 둘이되 창자(唱者)는 하나였다. 몰입한 관객은 추임새를 토해냈다.

올해 소리 인생 60년을 맞은 안숙선은 이날 판소리 춘향가 하이라이트 '사랑가'를 새로운 구성(작곡 임준희)으로 들려줬다. 첼리스트 정명화와 협연했다. 판소리와 첼로가 주고받고 놀면서 엎치락뒤치락했다. 명창은 때로는 춘향, 때론 몽룡이 돼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 속으로 관객을 데려갔다. 손에 쥔 부채는 여느 부채와는 달라 보였다. 펴고 접는 호흡기관 같았다. 감정의 일부처럼 다가오는 물건이었다.

안숙선에게는 사투리에 얽힌 일화가 많다. 식당에 가서 “(저기) 끓어쌌는 거”를 주문했는데 점원이 “그럴싸한 거요?” 했단다. 매주 닷새는 한 시간 이상 걷는다. 등산할 땐 자진모리 장단으로 빨리 오르곤 한다. 얼굴 주름 속 어딘가에서 춘향이와 이 도령, 향단이와 방자, 월매와 변 사또까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재산목록 1호는 목청

그 보름 전 안숙선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귀를 의심했다. 명창의 목소리가 개미 소리처럼 작았다. 들리는 둥 마는 둥이라 "혹시 지하에 계신가요?" 물을 정도였다. 늘 스피커폰으로 통화한다는 사실을 며칠 뒤 알았다. 처음 마주했을 때 작은 체구(키 153㎝)와 목에 감은 스카프부터 눈에 들어왔다.

―하도 안 들려서 어디 편찮으신가 했습니다.

"귀 시끄러울까 봐 멀찍이 놓고 통화해서 그래요."

―더운 날 스카프를 하고 나오셨네요.

"이렇게 산 지 30년쯤 됐어요. 잘 때도 목을 싸매고 잡니다."

―명창에게는 목청이 재산목록 1호군요.

"이걸 떼면 감기가 쉽게 든다는 고정관념이 있어요. 찬바람이 휙 지나가면 소리가 금방 달라집니다. 집에 머플러만 200개가 넘어요. 서른 살 무렵 국립창극단 들어가면서부터 밴 습관이에요."

―그렇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그전에는 전통음악을 업으로 하겠다는 확신이 없었어요. 판소리를 바라보는 시선도 따갑게 느껴졌지요. 일은 안 하고 쓸데없이 노래나 부르고 댕긴다는 식으로. 어른들 손에 붙들려 어려서부터 국악을 했지만 평생 이걸 하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불안했는데 창극단 시절부터 판소리의 예술성을 알게 됐고 책임감도 생겼습니다. 죽을 때까지 소리 하려면 관리 잘 해야죠."

―무더위에 집에서 에어컨도 안 트나요?

"에어컨은 작년에 처음 생겼어요. 제자들 앉혀놓고 가르치다 덥다고 할 때만 가끔 틀어요. 혼자 있으면 선풍기도 안 써요. 부채로 한여름을 납니다."

―판소리 하는 사람은 젊어서부터 얼굴에 주름이 많다면서요. 춘향가라면 춘향이와 이도령, 향단이와 방자, 월매와 변사또까지 혼자 다 표현해야 하니까요.

"온몸의 세포를 잡아당겨서 소리를 내요. 색깔과 느낌이 달라지고 장단과 감정에 변화가 있어 누가 누구인지 다 느낄 수 있어요. 발림이라고 부르죠. 몸짓만으로도 이해시켜야 합니다."

안숙선(왼쪽)이 지난 18일 남원에서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를 부르고 있다. 오른쪽은 첼리스트 정명화.

"춘향아, 내 왔으니 점심 차려라"

안숙선은 1949년 지리산 자락 남원에서 태어났다. 이몽룡이 그네 뛰는 춘향을 보고 매료됐다는 광한루가 어릴 적 놀이터였다. 아홉 살 때 이모(강순영)에게서 가야금을, 외삼촌(강도근)과 주광덕 선생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일찌감치 '남원의 아기 명창'으로 불렸다.

―광한루에서 놀 땐 이렇게 될 줄 아셨나요?

"짐작이나 했겠어요? 유서 깊은 곳인 줄도 모르고 놀았죠. 사자상과 거북상에 기어올라가 쪼르르 미끄럼을 탄 기억이 납니다."

―외가 어르신들이 당대의 대가들이었으니 소리의 길은 숙명이었겠군요.

"제가 아주 새침데기였고 내성적이었어요. 남 앞에 나서는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외갓집 어르신들 덕에 타악, 춤, 기악을 배웠지요."

―나중에 성격이 바뀐 건가요?

"외향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했어요. 그러지 않고서야 무대에 올라 소리를 할 수가 없으니까요. 젊었을 땐 말도 잘 안 했는데 이제 할 말 못 할 말 다 하고(웃음). 밖에서 활동하는 여자가 너무 말이 없으면 안 되잖아요."

―'아기 명창 안숙선'은 어땠나요?

"제가 노래를 좋아하긴 했어요. 국민학교 쉬는 시간에 선생님들이 '숙선이 데려와라' 해서 노래를 시켰지요. 소풍 가면 큰 능에 올라가 노래를 했어요. 강가에 가면 넓은 바위 위에서 민요를 불렀고요."

―무덤과 바위가 주 무대였군요.

"네, 그랬죠(웃음). 귀동냥으로 듣고 익혀서 부르던 시절입니다. 소리를 배우니 목소리가 굵어졌어요."

―친구들과 뛰어놀고 싶었을 텐데요.

"친구들이 너는 그거(소리) 하지 마라, 그냥 공부하고 우리랑 같이 놀자, 공연하느라 학교도 빠지는데 왜 하냐고 말렸어요. 혼란스러웠지요. 어릴 땐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판소리 부여잡고 있으면 결혼 잘 하고 한 가정의 여인이 되는 줄 알았어요."

―판소리 사설에 어린아이는 뜻도 모르는 말이 수두룩하잖아요.

"춘향가 중에 옥에 갇혀 매를 맞은 춘향이에게 이 도령이 나타나 '춘향아, 내가 왔으니 정신 차려라' 하는 대사가 있어요. 저는 그걸 '점심 차려라'인 줄 알고 흉내 내고 그랬죠(웃음). 사설집이 없던 시절이라 뜻도 모르고 나오는 대로 따라 불렀던 겁니다. 춘향의 정절(貞節)이 뭔지 알기나 했겠어요?"

―물어볼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군요.

“소리를 내는 게 더 중요했어요. 스승님들은 ‘목을 통성으로 내라’ ‘소리를 질러라’ 하셨고 내용은 좀 뒷전이었지요. 녹음기도 없으니 스승님 성음(聲音)을 기억으로 더듬어서 100번씩 반복연습하며 소리를 풍부하게 만들었어요. 음, 높이, 감정 등을 나름대로 기호로 만들어 악보처럼 적으며 익혔지요. 그렇게 배운 것들이 오래가요.

명창의 길, 스승 두 분

안숙선에게는 큰 스승 두 분이 있다. 서울에서 공부할 기회를 만들어준 만정 김소희(1917~1995)와 인간문화재가 될 수 있도록 가야금 병창을 전수해준 향사 박귀희(1921~1993)다. 1960년대 말 당대의 국창(國唱) 만정이 전화로 “안숙선·옥선 자매가 재주가 있다 하니 보고 싶다”고 했다.

―서울로 올라가 소리와 춤, 설장구와 가야금을 보여드렸다고요.

“서울역 건너편 2층 다방에서 처음 뵈었어요. 연탄난로에 올려놓은 물주전자가 한참 끓고 난 뒤에 삐걱거리는 나무계단 소리가 나더니 스승님이 나타나셨지요. 음악실로 옮겨 재주를 보여드렸더니 딱 한 마디 하셨어요. ‘싹수가 있구나’.”

―올해는 만정 탄생 100주년이기도 합니다.

“만정 100주년에 견주면 제 데뷔 60년은 아무것도 아니죠. 스승님과 소리에 대한 열정이 오래 기억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옛날에는 판소리나 농악이 우리 일상 속에 있었는데 무대로 장소를 옮기면서 생활과는 멀어졌지요. 어린아이들이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배우듯이 어떻게 하면 우리 음악을 일상으로 다시 가져갈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그게 스승님 뜻일 테고요.”

―정명화와의 협연도 그 방편 중 하나군요.

“국악과 클래식의 접점을 확인한 셈이죠. 88올림픽 끝나고 유럽 7개국 12개 도시에서 판소리 순회공연을 했어요. 굉장히 걱정했죠. 말도 안 통하고 오케스트라도 없는데 관객이 쿨쿨 자버리거나 도중에 나가버리면 어쩌나. 악몽까지 꿀 정도였어요. 그런데 다들 박수치며 환호하는 겁니다. 큰 용기를 얻었지요.”

―만정이 지금 계신다면 뭐라 하실까요?

“흐흐흐. 선생님은 ‘첼로랑 어울림도 좋지만 소리를 더 열심히 하라’ 하시겠죠. 집중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니까요. 박동진 명창 아시죠? 그분도 ‘숙선이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소리를 놓지 마소’ 하셨습니다.”

―1972년 만난 향사는 어떤 스승이었나요?

“만정 선생님이 자부심 강한 예술가였다면 향사 선생님은 국악계 마당발이셨어요. ‘너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수타(스타)야. 매스컴(마스크)도 좋잖아’ 하시며 영어도 척척 쓰셨죠. 제가 소리 하느라 40㎏도 안 나갈 만큼 살이 빠졌던 적이 있어요. 향사 선생님이 저를 병원에 데려가 ‘얘가 내 수제잔데 어디가 아픈가 좀 봐주세요’ 했고, 민물장어를 고아서 들통에 넣어 보내주시기도 했지요.”

―듣고 보니 만정이 더 엄한 스승 같습니다.

“한 마디를 해도 모지락스럽게 하셨죠. 두 분이 때로는 아버지 같은 호된 꾸지람, 때론 어머니처럼 따뜻한 보살핌으로 제게 소리의 길을 터주고 불을 밝혀주셨어요. 제가 선생님들 나이가 되니 국악계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잖아요. 맘 놓고 공부만 하면 됐던 시절이 그리워요.”

만정이 말년에 병원에서 건네준 메모를 안숙선은 종종 꺼내본다고 했다. 제목이 ‘주의사항’이다. ‘차원 높은 예술인이 되려면 품위를 지켜야 한다. 무대에서 판소리 대사 외에 딴 양념을 넣는다면,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자기선전일 뿐이다.’

국립극장 보일러실의 귀신

아홉 살 때 전북 남원 대표로 경남 밀양에서 공연한 안숙선(왼쪽).

사람은 누구나 소의 잔등처럼 부드럽게 살고 싶어한다. 소리 인생은 덜거덕거렸다. 1970년대 서울에 올라왔지만 먹고살 길이 막막했다. 안숙선은 워커힐호텔에서 소리로 돈을 벌었고 남편과 시어머니는 신촌에서 순댓국을 팔았다.

―호구지책이었군요.

“제가 남편한테 ‘이렇게 형편없나, 먹여 살려야지’ 했더니 식당을 연 거예요. 장사가 좀 되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남편은 어머님이 힘들어하신다며 혼자 할 수 있는 업종으로 바꾸자는 겁니다. 효자 노릇 하겠다는데 어찌 막습니까.”

―그래서 뭘 하셨나요?

“젖소를 사서 우유를 짰어요. 갓 짠 우유가 참 고소해요. 그 시절에 원 없이 먹었네요. 남편은 그렇게 3년 젖소 키우다 어느 회사에 들어갔지요.”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뒤로 춘향과 심청을 도맡으면서 소리 인생에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귀신으로 오해받은 적도 있다고요?

“개인 연습실이 없었어요. 연습하러 갔는데 누가 있으면 서로 방해가 돼요. 그럼 지하 보일러실로 갔어요. 거기가 따뜻해요. 퇴근시간 되면 수위들이 막 돌아다니잖아요. 컴컴한 데서 소리가 나니 들어와서 손전등을 비춘 거죠. 그런데 제가 연습하느라 머리가 다 헝클어져서 딱 귀신 같았겠죠. ‘누구요?’ 묻는데 가느다란 소리로 ‘저예요’ 하니 더 무섭지요. 하하하.”

―그 시절 연습벌레로 소문나더니 1986년 전국명창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지요.

“국립극장 연습실 유리창으로 남산의 계절이 바뀌는 걸 봤어요. 봄에는 새싹이 올라오고 어느새 장마철 지나 여름이 되고 어느 때는 낙엽이 지고 또 눈이 소복이 쌓이고.”

―1986년 적벽가를 시작으로 해마다 한 바탕씩 완창(完唱) 발표회를 열었지요. 가장 긴 완창은 몇 시간이었나요?

“춘향가인데 6시간 반에서 7시간 걸립니다. 중간에 재담도 넣고 관객이 웃다 보면 더 길어지죠.”

―갑자기 든 생각인데 마누라가 완창하는 사람이면 부부싸움을 당해낼 수 없겠어요. 속사포로 7시간 동안 융단폭격을 해댈 테니.

“부부싸움을 누가 판소리 용어로 한답니까. 노상 판소리만 해서 일상어를 몰라요. 남편한테 늘 지죠.”

―롯데콘서트홀에서 흥보가 공연을 할 때 ‘흥부네 열한 식구가 박에서 나온 쌀로 밥을 지었는데, 아 그 밥덩이가 얼마나 큰고 하니 롯데콘서트홀만큼 컸다더라’ 하셨지요?

“재담인데 요즘 말로 MSG를 친 거죠. 만정 선생님이 보셨다면 혼났을 거예요(웃음). 공부를 더 해야죠.”

―소릿길 60년인데 나머지 공부를 하나요?

“소리는 안 쓰면 녹이 슬어요. 어설피 해서는 안 되고요. 완창 판소리 공연도 사실 약속부터 하고 딴 짓 못하게 옭아맨 거예요.”

―감옥을 지어 가둔 거군요.

“완창 판소리 한 바탕 준비하면서 1년씩 보냈어요. 나이가 먹으니까 괜히 쓸데없는 데 간섭도 하고 잔소리도 하고 해싸서. 이러지 말아야지, 공부를 해야겠다 합니다.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하하하, 아이고.”

명창 안숙선에게는 스승이 둘 있다. 왼쪽은 만정 김소희(왼쪽) 선생과 서울 삼청동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 사진은 홍콩아트페스티벌에 갔을 때 향사 박귀희(오른쪽) 선생과 함께.

“이렇게 늙은 춘향이 어딨어?”

10년쯤 전 유명한 원로배우가 연극무대에서 큰 실수를 한 적이 있다. 대사를 몽땅 까먹은 것이다. 1막은 간신히 수습해 끝냈는데 2막이 문제였다. 배우는 두려웠다. 2막에 등장할 때 그의 손엔 대본이 들려 있었다. 그 일화를 들려주자 안숙선은 또 ‘아이고’를 토해냈다.

―소리꾼에게 완창이란 무엇인가요?

“나는 이만큼입니다, 하고 가진 걸 모두 꺼내놓는 자리죠. 무서워요.”

―이제 완창을 하긴 무리인가요?

“저도 그 배우와 같아요. 판소리도 다 외워서 부르는 거잖아요. 소리 인생 60년이라는데 앞으로도 소리 놓지 않고 잘 할 수 있는지 반성부터 하게 되네요. 완창을 하고 싶어도 옆에서 만류해요. 그래도 해볼까 하는 욕심과 내려놓아야지 하는 단념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마라토너는 35㎞쯤 달리면 극한의 고통을 넘어 ‘러너스 하이’라는 쾌감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소리꾼도 완창할 때 고통 속 희열을 맛보나요?

“완창을 한다는 건 토막 소리와는 다르잖아요. 춘향이의 긴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사는 것이죠. 춘향이의 희로애락을 다 소리로 표현해야 하고요. 한 바탕을 했다면 그 세계를 알았다는 것이죠. 다섯 바탕을 지나온 건 판소리 교과서를 다 뗀 것과 같아요. 어떤 소리의 세계를 펼쳐나갈 것인가는 거기서 다시 시작이죠.”

―천하무적이고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아니군요.

“교과서만 뗐다고 소리가 됩니까. 반대로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진 거죠. 상 받는 것도 그래요. 어디 가서 소리를 했는데 ‘대통령상 받은 사람이 뭐 저래’라는 말을 들으면 안 되잖아요. 무대 하나하나가, 상장 하나하나가 소리꾼에게는 등짐이 더 늘어나는 거예요.”

―판소리의 매력은 뭔가요.

“노래를 하는데 커다란 집을 지었다가 와르르 부수기도 하고, 또 이 세상을 벗어나서 보이지 않는 곳을 헤매고 놀다 오기도 하죠. 그걸 소리 말고 무엇으로 경험할 수 있겠어요.”

―작고 단단한 체구로 객석을 사로잡는 괴력의 비결 같습니다.

“옛날 어른들이 소리가 잘 안 되는 날엔 ‘오늘은 적벽가 불을 지르러 갔다가 모깃불도 못 놓고 돌아왔다’고 한탄했어요. 소리꾼이 소리의 공력으로 관객을 깜빡 속이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에요.”

안숙선은 영화 ‘서편제’에서 여주인공 송화의 중년 목소리(7분 길이)로도 기억된다. ‘영원한 춘향’ ‘판소리의 프리마돈나’로도 불린다. 가장 듣기 좋은 수식어가 뭔지 물었다. “늙는데 무슨 춘향이에요? 득음이 되고 싶다고 되나요? 제 소리가 중요하죠. 명창이면 족하고 ‘안숙선이 나와서 소리 하겠습니다’ 할 때가 편해요.” 입속말로 추임새를 넣었다. 얼씨구,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