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옥자'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옥자'는 얼핏 야만스러운 육식을 반대하고 채식주의를 권하는 유사 '공익광고'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래서 옥자가 겪는 고초를 쭉 지켜본 관객들은 최소한 영화를 본 당일 저녁에는 삼겹살을 먹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옥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육식은 악이며 채식은 선이라는 생명존중의 사상을 전파하려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전투적 의지를 발견해내기에는 '옥자'의 결말이 적잖이 김 빠진다. 그렇다면 봉준호 감독은 슈퍼돼지 '옥자 구하기'의 대장정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한 걸까.
영화 '옥자' 안에는 참 다양한 캐릭터와 종(種)과 국적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 등장인물들의 면면을 보자. 틸다 스윈튼, 안서현, 제이크 질렌할, 스티븐 연, 폴 다노, 릴리 콜린스, 지안카를로 에스포지토, 변희봉, 그리고 옥자.
이토록 다채로운 인물들, 그리고 동물이 각자의 스토리를 갖고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어우러지는 일이 또 있었을까. 왁자지껄한 '옥자 데려오기' 소동극은 개성 강한 배우들의 깜찍한 열연으로 다소 산만하지만 풍성하게 완성되었다. 이 귀여운 블록버스터는 미자(안서현)와 옥자의 종을 뛰어넘는 우정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세계가 복작거리고 있다. 이 세계들이 옥자를 사이에 두고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며 귀여운 전시회를 열었다.
'옥자'에서는 복작대는 인물들이 뭉뚱그려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각자 인물들의 확고한 세계가 각양각색으로 꽤 뚜렷하게 보인다. 등장인물들 모두 철저하게 각자의 목표와 신념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 목표와 신념은 한 인간의 세계다.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있다.
미자는 십년지기 옥자를 다시 집으로 데려와야 한다는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한다.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는 악명 높았던 '미란도 코퍼레이션'을 정의롭고 깨끗한 기업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병적으로 집착하는 인물이다. 더불어 친언니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어 언니를 반드시 넘어서겠다고 벼르고 있기도 하다. 비밀 동물보호 단체 ALF의 리더인 제이(폴 다노)는 비록 급진적인 단체의 리더이기는 하나 살상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 등 생명존중 사상의 철저한 신봉자다.
ALF의 2인자 케이(스티븐 연)는 단체의 활동 자체를 즐기고 또 일을 벌이는 인물이다. 그 누구보다 단체에 애정이 있으며 어떤 경우에서라도 선의의 활동은 중지돼서는 안된다는 신념이 있다. ALF의 또 다른 멤버 실버(데본 보스틱)는 엄격한 비건(vegan:채식주의자)이다. 절대 단백질을 섭취하지 않으므로 만성 빈혈에 시달려 걸핏하면 쓰러진다.
프랭크 도슨(지안카를로 에스포지토)은 기회주의자다. 그가 신봉하는 건 강자다. 1인자에 붙어 안정을 도모하는 2인자에 만족하는 인물이다. 박문도(윤제문)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회사의 명령에 충실하는 사람이며 월급만 잘 받는다면 그에게 옳은 것을 추구하는 가치란 의미가 없다. 마지막으로 루시 미란도의 언니 낸시 미란도는 어떨까? 그녀는 철저한 자본주의자다. 돈을 생명보다 상위의 가치로 두는 인물이다. 그러한 그녀의 신념은 아이러니하게도 옥자를 구한다.
이렇게 '옥자' 속 인물들은 각자 확고한 세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세계에 충실한 삶을 산다. 이 세계들이 서로 다른 가치를 갖고 있으므로 때때도 충돌하고 대립한다. 영화 '옥자'는 이 세계들이 서로 부딪치며 그 속에서 무지개색의 폭죽이 터지는 듯한 잔상을 관객에게 남긴다. 정말 귀엽고 예쁜 갈등이다.
알록달록 폭죽처럼 갈등이 피어날 때, 육식동물의 살상은 천연덕스럽게 그리고 완벽한 질서 속에서 가차없이 진행된다. 들판에 빽빽이 들어찬 수많은 옥자들이 울부짖으며 죽음을 기다리는 그 어두운 밤은 이 귀여운 블록버스터 안에서조차 끔찍하고 음울하게 느껴진다. 저 옥자들은 깔끔하게 포장된 정육식품인 채로 곧 세계여행을 떠날 것이다.
이 참혹한 산업을 글로벌하게 착착 실행하고 있는 미란다 코퍼레이션은 이 영화 속에서 어떤 벌도 받지 않는다. 벌을 줄 근거가 없다. 어차피 사람은 고기를 먹어야 하는 잡식의 종이며 철저하게 비건으로 산다면 평생 빈혈에 시달릴 테다. 미자의 할아버지 희봉(변희봉)도 손녀 먹이려고 닭백숙을 끓인다.
'옥자'는 각양각색의 세계가 충돌할지언정 누가 옳고 그르냐를 심판하지 않는다. 그런 탓에 결말이 김이 빠진다. 옥자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 상대에게 피의 복수는 마련되지 않았다. 미자는 돈을 주고 나만의 옥자만 구해서 그 지옥을 빠져나올 뿐이다.
수십억 인간들이 복닥거리며 살고 있는 이 지구에는 수십억의 세계가 존재할 것이다. 한 인간의 신념과 목표와 가치가 들어있는 서로 다른 세계들이 지구 안에서 귀엽고 예쁘게 갈등하려면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배려를 해야 할까. '옥자'를 보며 삼겹살을 먹으면 안되겠다는 생각보다, 육식주의자와 채식주의자가 한 테이블에 앉아 맛있는 한 끼를 즐기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그런 생각이 더 많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