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현지 시각) 영국에서 발생해 사상자만 80여명이 넘는 대형참사로 번진 ‘런던 고층 아파트 화재’의 원인으로 냉장고 폭발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여러 명의 생존자가 4층 주민으로부터 ‘고장 난 냉장고가 폭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현지 보도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냉장고가 폭발했다고? 그렇다면 우리 집 냉장고는?’
바다 건너에서 발생한 일이지만 이 외신에 불안감을 느낀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지난 6개월간 국내 냉장고 폭발 관련 신고는 ‘2건’
냉장고는 가전제품이기에 합선이나 누전 같은 전기적 요인에 인한 발화 사고는 종종 발생한다. 그렇지만 폭발로 이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한국소비자원 문의 결과, 지난 6개월간 ‘소비자위해감시시스템’에 접수된 냉장고 폭발 관련 신고는 2건이었다. 이중 명확히 폭발로 볼만한 사건은 1건으로, 지난해 구입한 가정용 냉장고 내부에서 발생한 폭발로 선반 강화유리가 깨지고 신고자가 열상(裂傷)을 입었다는 내용이었다.
화재와 폭발은 엄밀히 말해 다르다. 화재감식 분야에서는 화염과 함께 ‘물리적 위력’을 동반했을 경우에만 폭발로 본다. 단순히 소리만 ‘펑’하고 불이 붙은 경우에는 폭발이 아니라 단순 화재인 셈이다.
국내 첫 가정용 냉장고 폭발사고로 공인된 것은 2009년 10월 발생한 삼성 지펠 냉장고 폭발 사고다. 당시 경기도 용인시의 한 아파트 가정집에 있던 2006년형 삼성 지펠 냉장고(680ℓ)가 폭발해 냉장고 문짝이 날아가 다용도실 유리문과 창문을 깼고, 깨진 유리 파편이 1층으로 떨어져 차량 3대에 파손을 일으켰다.
당시 사고를 수습했던 소방서 관계자는 "현장에 가보니 화재 흔적은 없었다"면서 "냉장고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해 폭발한 것으로 추정했다"고 밝혔다. 이 사건 감정 의뢰를 받았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역시 해당 사건을 ‘폭발’로 감정했다.
해당 냉장고를 수거해 조사했던 삼성전자는 사고 원인에 대해 “냉매(冷媒·열교환기에서 열을 빼앗기 위하여 사용되는 물질) 파이프의 서리를 제거하는 히터의 연결 단자에서 누전이 발생하면서 이에 따른 발열로 일어난 것”이라며 관련 모델 제품 21만대에 대해 리콜을 했다.
◇“냉장고 폭발은 냉매인 가연성 가스 누출에 의한 폭발”
국내에서 냉장고 폭발이 극히 드문 이유는 냉매로 쓰이는 가스가 보통 불연성(不燃性)이기 때문이다.
냉동공조기기 제조업계에 따르면, 2016년 기준 국내 전체 냉매량의 95%를 차지하는 냉매는 프레온계 가스로 분류되는 ‘수소염화불화탄소(HCFC)’와 오존층을 파괴하는 프레온계 가스를 대체하기 위해 1980년 개발된 ‘수소불화탄소(HFC)’다. 두 냉매는 기본적으로 불연성 가스다.
한 화재감식 전문가는 “프레온계 가스와 대체프레온 가스는 안정적이고 불연성 물질이라 불이 나도 폭발하지 않는다”며 “기본적으로 냉장고는 폭발 위험성이 적은 안정적인 제품”이라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드물게 냉장고 폭발 사고가 일어나는 이유는 가연성 가스를 냉매로 쓰는 냉장고가 있기 때문이다. 이 전문가는 “냉장고 폭발은 냉매인 가연성 가스 누출에 의한 폭발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며 “냉장고 안에는 냉매 가스가 밀봉된 금속관이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든 금속관 속 가스가 누출돼 공기와 혼합되고, 스파크 같은 점화원과 결합하면 충분한 폭발 에너지가 된다”고 설명했다.
실제 폭발 사고를 일으켰던 당시 삼성 지펠 냉장고 모델에도 가연성인 이소부탄(Isobutan)이 냉매로 쓰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화재감정을 담당하는 박종택 연구관은 “냉매 중에서도 탄화수소(HC)계열 냉매가 가연성이 있어 폭발 위험성이 있다”며 “이소부탄이 바로 탄화수소계 냉매”라고 말했다.
하지만 가연성 가스를 냉매로 쓴다고 해서 폭발 위험성이 높은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냉매 가스가 금속관에서 빠져나오면 냉장고의 냉장·냉동기능이 현저히 저하돼 수리로 이어진다. 즉 가스 누출 시 냉장고 기능 저하가 눈에 띄기 때문에 누전이나 합선 같은 발화문제가 추가로 발생하기 전에 수리되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다.
◇폭발 위험에도 가연성 냉매 쓰는 이유, ‘친환경 딜레마’
폭발 위험이 있음에도 탄화수소계 냉매가 사용되는 이유는 친환경성과 높은 에너지효율 때문이다. 프레온계 가스(CFC, HCFC)나 대체 프레온 가스(HFC)는 오존층 파괴나 온실효과에 따른 지구온난화 문제로 국제사회의 강력한 규제를 받는 반면, 탄화수소계 냉매는 천연냉매로서 독성이 없고 화학적으로도 안정적이라 규제를 받지 않는다. 특히 이소부탄은 에너지효율성이 좋아 미국과 유럽에서도 가정용 냉장고 냉매로 많이 쓰인다.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Greenpeace)가 2012년 발표한 냉매 관련 보고서(Cool Technologies: Working Without HFCs)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적으로 6억5000만대가 넘는 냉장고가 탄화수소계 냉매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전 세계 냉장고 생산량의 40% 수준으로, 보고서는 이 점유율이 2020년 80%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다.
프레온계 가스(CFC, HCFC)는 인화 위험이 있는 천연냉매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됐지만, 국제 환경규제로 사라지고 있다. CFC는 1987년 채택된 몬트리올의정서에 따라 2009년을 마지막으로 생산 및 소비가 금지됐고, HCFC 역시 1992년 채택된 몬트리올의정서 코펜하겐 수정안에 따라 생산 및 수입이 선진국은 2020년, 개도국은 2030년에 금지될 예정이다.
두 프레온계 가스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된 HFC 역시 온실가스 효과가 이산화탄소의 1만배 이상이라는 결정적 결함이 발견돼,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정과 2016년 키갈리개정의정서에 따라 규제를 받게 됐다.
결국 천연냉매를 대체하고자 개발된 합성냉매가 환경규제로 사라지면서 인화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천연냉매로 회귀하는 ‘친환경 딜레마’가 발생한 것이다.
◇한국도 앞으로 냉장고 폭발 사고 늘어난다?
국제 환경규제에서 선진국으로 분류된 유럽은 개도국보다 관련 가스 규제를 일찍 적용했다. 유럽은 약 20여년 전부터 프레온계 가스(CFC, HCFC)나 대체프레온 가스(HFC)를 탄화수소계 가스로 전환해 왔다. 이미 영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사용되는 냉장고는 가연성 냉매를 사용하고 있다.
포르투갈의 베이라 인뜨리오르(Beira Interior) 대학 연구진이 2015년 내놓은 ‘냉동공조 설비의 발전과 활용에 관한 연구(Handbook of Research on Advances and Applications in Refrigeration Systems and Technologies)’에 따르면, 유럽 냉장고의 95%가 탄화수소 냉매로 가동되고 있다.
그 결과 유럽에서는 냉장고 폭발 사고가 한국보다 훨씬 자주 발생한다. 한국에선 아직 냉장고 폭발로 인한 사망자가 없었지만 영국에서는 지난 6년간 수십 건의 냉장고 폭발 화재가 발생해 7명이 숨지고, 70여 명이 다친 것으로 알려졌다. 6월 초에도 웨일스 남부 쿰브란에서 냉장고 폭발 화재가 발생해 29세 여성이 숨진 바 있다.
한국도 국제규제 추세에 따라 가연성 냉매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난해 합의된 키갈리개정의정서에 따라 한국을 비롯한 100개 개도국은 2024년부터 HFC의 단계적인 감축에 들어가 2045년까지 2020~2022년 사용량의 80%를 감축해야 한다.
이미 가전업체들은 HFC 냉매를 서서히 퇴출시키고 있는 중이다. 국내 냉장고 제조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2013~2015년 이후 생산되는 냉장고 모델에는 대부분 이소부탄 냉매가 적용되고 있다.
가전업체 한 관계자는 “2015년 전에 생산된 냉장고는 R-134A(HFC계 냉매)를 주로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후부터는 환경규제를 감안해 (국내에서도) 유럽과 같이 이소부탄 냉매를 적용한 냉장고를 생산하고 있다”고 밝혔다.
결국 한국도 앞으로 영국처럼 냉장고 폭발 사고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