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6월인데도 이른 아침부터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이다. 더위를 쫓으려고 자연스레 손으로 부채질하게 되고, 부채를 찾게 되고, 선풍기와 에어컨이 있는 곳을 찾아가게 된다. 더위를 날려줄 바람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자연이 주는 바람만으로는 부족해,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인공 바람. 그 바람의 역사를 정리해 봤다.
부채
'부채'의 시작은 넓은 활엽수의 나뭇잎을 이용한 데서부터 비롯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모습은 아프리카 산간 지대의 원주민들과 동남아시아의 산간 지대 원주민들의 생활에서 오늘날까지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나뭇잎은 시간이 지나면 사용할 수 없게 돼, 좀 더 오래 보관하면서 쓸 수 있는 소재를 찾아 부채를 만들게 됐다. 부채의 소재는 나뭇잎에서 깃털, 깃털에서 가죽, 가죽에서 비단 그리고 종이로 이어졌다.
깃털 부채는 '扇(부채 선)'자에서 알 수 있듯이 나뭇잎 이후 가장 먼저 나온 부채 유형이다. 우선(羽扇)이라고 불린 이 부채는 타조, 공작, 꿩, 까마귀 등의 깃털을 이용해 만들었다. 그다음으로 나온 가죽 부채는 피선(皮扇)이라고 불렸으며 사슴, 말, 소 등의 가죽으로 만들었다.
이후에 비단이 나오면서 이를 부채로 만들어 썼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공민왕 때 건국 공신에게 하사했던 부채가 온전한 모양을 갖춰 보물로 남아있다. 이후 종이가 발명되며 가볍고 내구성이 좋은 종이부채가 주류를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종이부채의 등장으로 부채는 단순히 더위를 식히는 생활 도구에서 예술품으로 거듭나게 됐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깃털 부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부채는 이집트 투탕카멘 왕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됐다. 황금봉에 타조 깃털을 붙인 것으로 벌레가 갉아 먹기는 했지만 3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형체를 확인할 수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부채 유물은 경남 의창군 다호리의 고분에서 출토한 옻칠이 된 부채 자루다. 원삼국 초기인 기원전 3, 4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물건으로 남아있진 않지만, 황해도 안악군 유설리의 안악 3호 고분벽화의 인물도에서도 깃털로 만든 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이 있다. 이 고분은 영화 13년(357년) 10월에 조성된 것으로 4세기 이전부터 깃털로 만든 부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문헌에서도 깃털 부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918년, 후백제의 왕 견훤이 왕건의 즉위 소식을 듣고 축하의 뜻으로 공작선(孔雀扇)을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공작선은 공작의 깃으로 만든 것으로 당시에도 상류사회에서만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서양 귀부인들의 부채, 18~19세기 사교장선 은밀한 커뮤니케이션 도구였다]
["1950년대엔 부채 한 자루가 쌀 9kg 가격과 맞먹었죠."]
선풍기
최초로 선풍기 발명한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이유
전구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은 에디슨, 전화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은 안토니오 무치처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가전제품 대부분은 최초의 발명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선풍기를 누가 발명했는지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선풍기가 누구의 발명품인지 찾기 어려운 이유는 바람이 불면 날개가 돌아가고, 반대로 날개를 돌리면 바람이 분다는 선풍기의 핵심 원리가 오래전부터 인류에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보편적 견해에 따르면 최초의 선풍기는 1600년대에 나왔다. 천장에 매달아 놓은 추의 무게를 이용해 기어장치의 회전축을 돌려 1장으로 된 커다란 부채를 시계추 모양으로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기계적인 선풍기로 처음 기록된 것은 1800년대 초 중동에서 쓰인 '푼카(punkah)'라는 선풍기다. 1850년대에는 현재의 탁상 선풍기 모양으로 된 것을 태엽으로 감아 사용하는 게 나왔다.
전기를 이용한 선풍기는 T.A 에디슨이 발명했다. 이 선풍기는 팬 날개를 금속으로 만든 데다가 팬 보호 커버 역시 듬성듬성 만들어져, 선풍기가 돌아가는 것이 신기한 어린이들이 손가락을 집어넣었다가 절단되는 사고도 빈번했었다. 이후 점차 발달해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보호망을 씌운 선풍기가 나왔다.
200여 년 만에 날개 잃은 선풍기
태엽을 감아서 돌리든, 전기로 돌리든 선풍기는 1800년대부터 200여 년 동안 날개가 있었다. 이런 고정관념은 2009년 다이슨이 날개 없는 선풍기를 내놓으면서 깨졌다. 미국의 『타임』은 2009년 '가장 혁신적인 제품 톱10'에 이 선풍기를 올렸다.
선풍기는 그 모양만 변화한 게 아니다. 강풍의 기능을 강조하던 선풍기는 에어컨이 계속 발전하면서 다른 기능에 초점을 맞춰 진화 중이다. '자연에 가까운 바람'의 질, 수면 시 안심하고 켜둘 수 있는 약풍, 공기순환 기능을 강조하는 저상형 등 기능적인 면이 점차 강조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 선풍기가 도입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선풍기는 아마도 개항과 함께 입국한 서구 각구의 외교관이나 상인들, 또는 일본인들에 의해서였을 것으로 추정하며 시기도 대략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일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에어컨
최초의 에어컨은 사람을 위한 게 아니었다
에어컨은 에어컨디셔너(Air-conditioner, 공기조화기)의 준말이다. 에어컨을 최초로 개발한 사람은 미국의 윌리스 캐리어(Willis Carrier)다. 20대 초반의 캐리어는 뉴욕 버팔로 제작소에 엔지니어로 취업했는데, 인쇄소의 열과 습도를 조절하는 일을 맡았다가 1902년 에어컨을 개발하게 됐다. 그는 1906년 에어컨에 대한 특허를 얻고, 1915년 동료 6명과 함께 캐리어 엔지니어링사를 설립해 직접 에어컨 사업에 뛰어들었다.
초기 에어컨은 산업 현장에서 주로 쓰이다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백화점, 극장 등에 설치돼 사람을 위한 냉방장치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28년 미국 의회, 이듬해엔 백악관에 설치됐다. 1936년엔 비행기(유나이티드 에어라인·UA), 1939년엔 자동차(팩커드·Packard)에 장착됐다. 1955년 주택의 기본 사양으로 채택되면서 일반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에어컨 실용화 초기에는 룸 쿨러(Room cooler)라는 명칭이 일반적이었고, 기능도 냉방 전용이었다. 하지만 1970년경부터 냉난방용이 나오면서 룸 에어컨디서너(Room Air-conditioner), 줄여서 에어컨이라는 명칭이 정착됐다. 오일 쇼크 이후인 1977년경부터 에너지 절약 기술이 발달했고, 이로 인해 에어컨 시작이 급격하게 커졌다.
1982년부터는 인버터 에어컨이 등장했으며, 1980년대 중반부터 하나의 실외기로 두 대 이상의 에어컨을 쓸 수 있는 멀티형 에어컨이 보급됐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엔 공기 청정, 실내 환기, 산소 발생, 가습 등의 기능이 추가된 에어컨이 나왔다. 최근에는 찬바람이 몸에 직접 닿는 것을 최소화해 바람 없이 시원한 무풍 에어컨까지 개발됐다.
인공 바람의 진화는 어디까지?
더위를 날려버리려는 인간의 본능이 손을 휘젓고 나뭇잎을 흔들던 것에서 시작돼 버튼 하나만 누르면 냉방에 공기청정, 제습, 산소 발생까지 가능한 에어컨을 만들었다. 이제는 자연에 가까운 바람, 자연을 헤치지 않고 에어컨을 돌릴 수 있는 친환경적인 면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점차 더워지고 사막화돼가는 세계적 기후 변화 속에 인공 바람의 진화는 어디까지 계속될지 그 미래가 궁금해진다.
[에어컨도 'AI 바람'… 사람 동선 파악해 냉방·공기청정 척척]
■ 출처
전주한옥마을 부채박물관 (http://fanmuseum.co.kr/)
디지털창원문화대전(http://changwon.grandculture.net/?local=changwon)
한국인의 힐링 코드 (2013, 임윤선)
역사에서 경영을 만나다 (2008, 이재규)
■ 그래픽= 이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