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제목을 보신 분들은 '암, 그렇지. 공무원이 보통 일자리인가. 얼마나 좋은 직업인데'라고 맞장구치실지 모른다. 맞다. 넉넉한 정년에 평생 연금, 거기에 관(官)을 벼슬로 우러르는 문화까지 직업 안정성과 노후 보장, 사회적 평판까지 갖춘 흔치 않은 일자리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선비가 누리는 두 가지 복으로 관직과 영예가 주는 열복(熱福)과 은거하며 소박하게 누리는 청복(淸福)을 들었는데, 현대사회에서 그 두 복을 누릴 수 있는 직업으로 공무원만 한 게 없다.
통계청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 지난 13일 통계청이 발표한 공공 부문 일자리 통계에 따르면 전체 일자리 중 공무원의 20년 근속 비율은 비공무원의 네 배에 육박했다. 공공 부문에서 일하는 사람의 절반은 적어도 10년 이상 일했고, 정부기관 내 공무원의 지속 일자리(1년 동안 동일한 사람이 같은 일자리를 점유한 것)는 92.7%에 달했다. 이에 비해 비공무원의 근속 기간은 70.3%가 3년 미만이었다.
이 좋은 자리를 청년들에게 대거 개방하겠다는 것이 새 정부의 공약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공공 부문 일자리 81만개를 창출해 청년 실업을 해소하겠다고 약속했고, 취임 후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 설치'를 업무 지시 1호로 지시했다. 이를 위해 지난 12일 국회에서 추경 예산 12조2000억원의 처리를 호소하는 시정연설을 하며 '일자리'라는 단어를 44번, '청년'을 33번이나 언급했다.
청년 실업을 해결해 소득 주도 성장을 열겠다는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청년'과 '공공 부문 일자리'의 결합에서 뭔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실패조차 특권인 젊은 열정과 안정된 일자리가 연출하는 부조화 때문만은 아니다. 경제에 밝은 사람이라면 늘어나는 공무원이 나라 경제에 끼치는 세수 부담을 염려하겠지만, 내가 걱정하는 이유는 좀 다르다.
공무원은 그냥 일자리가 아니라 남을 배려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직업이다. 개인적 이해와 사회적 이해가 충돌할 때 후자를 앞세우는 '공동체 의식(public mind)'이 요구되는 자리이다. 윤리 의식과 준법정신은 기본이다. 사회적 규범을 지켜야 하고,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는 것도 합리적이고 신중해야 한다. 공공선은 경쟁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은 특성이 있다.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이상을 그리며 시장 원리가 해결하지 못 하는 일을 해내야 한다. 이를 위해 고도의 훈련과 교육을 받은 품성 바른 인재가 필요하다.
반면 우리 사회는 어떤가. 당장 교육제도부터 공적 마인드보다 경쟁력 함양의 입시 위주다. 협동심보다 개인기가 인정받고, 봉사활동은 스펙 쌓기 장식품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광화문이나 시청 광장 같은 공공장소는 나누고 비우는 곳이 아니라 점유하고 농성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학교 안과 밖 어디서도 남을 위해 살라는 메시지를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이런 사회에서 나고 자란 청년들의 공공 의식이 부족하다면 그건 전적으로 사회 책임이다.
이런 경쟁적 시스템의 승자들일수록 오히려 공공의식이 떨어질 개연성 또한 높다는 건 우리의 불행이다. 평소 이기적 유전자로 살다가 '어공(어쩌다 공무원)'으로 발탁된 고위 공직자 후보의 씻김굿 같은 청문회, 공직을 생계형 일자리나 출세의 디딤돌쯤으로 여기며 살아온 엘리트들이 그동안 공동체 이익보다 자기 패거리의 이해를 앞세우며 저지른 각종 패악을 되새겨 본다면 우리 사회 '공적 마인드' 지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뭘 해줄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물어라"는 말은 미국 J F 케네디 대통령이 후보 시절 젊은이들을 흔들어 깨운 유명한 경구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뉴 프런티어 정책'의 일환으로 '평화봉사단'을 출범시켰다. 지금까지 거의 20만명의 미국 젊은이가 139개국에 의료·교육·환경 분야 등 자원봉사를 하러 떠났다. 당시 젊은 시절을 보낸 미국의 정치인 중엔 케네디에서 영감을 얻어 공공 봉사의 길을 걷게 된 사람이 적지 않다. 그들에게 공공 일자리는 공공 봉사와 동의어였다. 하버드대학에 케네디 대통령의 이름을 딴 공공정책 전문 대학원이 생긴 건 우연이 아니다. 우리에게 공공 부문 일자리란 공공 봉사에 가까운가, 일자리에 가까운가.
새 정부가 청년들의 좋은 일자리를 늘리려 애쓰는 걸 모르지 않는다. 공무원 숫자를 늘리는 것 못지않게 그들이 '좋은 공무원'이 되도록 공공 봉사의 소명도 함께 심어주기를 바란다. 취업 요건을 검토해 기준을 강화하고, 필요하면 재교육도 철저하게 해야 한다. 81만명은 공직사회의 문화를 바꾸고도 남을 숫자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기적 유전자를 손보지 않고 일자리 창출에 매달리는 정부와 편한 일자리를 쫓는 젊은이들의 합작품으로 놔두기엔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다. 공무원은 그냥 일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