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개화를 방해한 수구파인가, 고종의 독립운동 비밀자금을 관리한 애국자인가.

소설가 김원우(70)가 운미 민영익(芸楣 閔泳翊·1860~1914)의 일대기를 조명한 장편소설 '운미 회상록'(전 2권·글항아리)을 냈다. 이 소설은 사료 70%와 작가의 상상력 30%로 이루어졌다. 김원우는 "역사학자 중 일부는 운미를 수구파로 평가하지만, 내가 보기에 운미는 근세 조선에서 가장 먼저 근대적 자아에 눈을 뜬 인물이었다"고 독특하게 해석했다. "그는 권력의 핵심에 있으면서도 조선 사회의 시스템에 절망했고, 개화파를 이해했지만 급진적이기보다는 온건 개화파였고, 서양 패션에 눈을 떠 조선의 양반 복식 개혁을 시도한 댄디였고, 워낙 예술가 기질이 강했기 때문에 정치가로 나서지 않은 채 망명지 상하이에서 세상을 뜰 때까지 모순투성이의 삶을 보냈다"는 것.

소설가 김원우는“민영익은 미국에 갔다 와서 누구보다 일찍 근대를 자각했지만, 고종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에 왕조를 찬탈하는 혁명에 나서지도 못한 채 점진적 개혁을 꿈꿨다”고 말했다.

1991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김원우는 세밀한 묘사와 곰삭은 만연체의 작가로 이름이 높다. 그는 집필 2년 끝에 완성한 이 소설에 대해 '역사 소설'이란 문패를 달지 않았다. "운미와 관련된 사료와 참고 문헌을 섭렵했지만, 그의 성장 과정과 심리 상태를 현대 소설의 기법으로 해석하고 형상화했다"는 것. 오늘의 관점에서 개인 민영익을 탐구하기 위해 회상록의 형식을 빌렸을 뿐아니라 성장소설·심리소설·환상소설·추리소설의 기법을 골고루 동원했다.

소설 '운미 회상록'은 '망명객 민씨 일대기'라고 적힌 대학 노트를 바탕으로 전개되지만, 그 일대기가 허구라는 것이 마지막에 드러난다. 운미가 스스로 회상록을 남긴 적이 없고, 그에 대한 평전도 제대로 나온 게 없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처럼 위서(僞書)를 진짜인 것처럼 내세운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허문 것. 그러나 이 소설에서 민영익이 겪은 사건들은 실제 기록을 벗어나지 않았다.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조카였다. 소년 시절, 명필로 꼽힐 만큼 예술가 기질을 타고났다. 민씨 정권의 후광으로 일찍 출세한 기득권 세력의 청년이었지만, 개화파와도 교분을 쌓았다. 1883년 미국에 친선 사절로 파견돼 백악관을 찾아 당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 대화도 나눴다. 이후엔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며 선진 문명을 익혔다.

1883년 9월 미국에 도착한 조선 첫 외교사절이 찍은 공식 사진. 정사 민영익(앞줄 왼쪽에서 둘째)이 조선의 공식 사절답게 관복을 입었다. 뒷줄 왼쪽에서 셋째는 수행원 유길준.

['운미 회상록' 소설가 김원우는 누구?]

김원우는 "운미는 미국에 갔다온 뒤 개화파와 점점 거리를 두게 됐다"며 "그는 조선의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점에서 척사파를 비판적으로 봤지만, 김옥균의 개화파가 당시 조선의 수준을 생각하지 않은 채 너무 앞서가면서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여겼다"고 풀이했다. 운미는 갑신정변 때 개화파의 공격을 받아 전신에 자상(刺傷)을 입었다. 미국인 의사 알렌의 치료 덕분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

김원우는 "운미는 고종의 신임을 얻어 비자금, 즉 내탕금(內帑金)을 관리했다"라며 "그는 장사꾼 기질도 있어서 그 돈으로 인삼무역업을 했지만, 고종폐위 음모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돼 상해로 망명을 떠나 그곳에서 난화(蘭畵)에 능한 예술가로 인정을 받고, 예술품을 수집하면서 지냈다"고 말했다. 소설에서 말년의 운미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이후 안 의사를 법적으로 구출하기 위해 강대국 변호사를 선임하는 일에 4만원을 쾌척한 것으로 그려졌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와 조선 통감이 '안중근 의거의 배후는 고종'이라고 외무성에 보고한 기밀 문서 6건을 발굴해 2009년 발표한 적이 있다. 한 보고서는 "배일(排日)의 본원(本元)은 한국 황제라고 한다"라고 했다. 다른 보고서는 고종의 심복으로 상하이에 있던 민영익 등이 안중근을 위한 영국인 변호사 선임 비용으로 거액을 냈다고 했다. 김원우는 "운미는 직접 회상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유길준의 '서유견문' 집필을 적극 권장하며 자신의 생각이 반영되도록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