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돈 크레머는 미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자 정책에 대해서도 강력 비판했다. 그는 음악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 비판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지난해 가을 영국 음악전문지 'BBC 뮤직 매거진'은 안네 소피 무터와 이차크 펄만 등 100명의 현역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물었다.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는 누구인가?'

1위는 우크라이나의 전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1908~1974). 야사 하이페츠 등 고인이 된 바이올리니스트가 그 뒤를 이었다. 6위에서야 살아 있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등장했다. 라트비아 출신의 기돈 크레머(70)였다.

정확하고도 빠른 손놀림, 클래식과 탱고를 묶는 파격, 음악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독재를 비판하는 정치적 소신으로도 유명한 크레머를 29일 서울 논현동에서 만났다. 티셔츠에 허름한 청바지를 입고 오전 10시 정각에 나타난 그는 설문 결과에 대해 "숫자놀음일 뿐 음악에 순위는 의미 없다"며 손을 저었다.

오늘(31일) 크레머는 자신이 이끄는 앙상블 '크레메라타 발티카'와 예술의전당에 선다. 1997년 조국 라트비아를 포함해 발트해 3국인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의 25세 이하 젊은 연주자들을 모아 만든 앙상블이다. 지난 27일 중국 공연에 이어 1일 대만으로 가는 숨 가쁜 일정이지만 그는 "연주와 휴식을 철저히 나눠 괜찮다"고 했다. 아시아 무대에선 안드라스 켈러가 지휘하는 콘체르토 부다페스트 심포니까지 가세해 바흐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과 현대음악 작곡가인 필립 글래스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 협주곡'을 들려준다. 그는 "바흐와 글래스는 나이 차가 250년 나지만 이집트 피라미드를 떠올리면 그건 아주 짧은 시간"이라 했다.

열여섯에 라트비아 콩쿠르를 석권한 그는 개성이 넘쳤다. 1969년 파가니니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이듬해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금메달을 땄다. 1972년 첫 연주회를 열던 날 모스크바 음악원의 스승 오이스트라흐는 '더 이상 너는 학생이 아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너의 길을 가라'고 했다. 크레머가 말했다. "책임 없는 자유란 의미가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어요. 그분은 내게 위대한 음악가는 자신을 높이기 위해 음악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음악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걸 몸소 보여줬어요."

1980년 서독으로 망명한 그는 전통에 머물지 않고 슈니트케와 구바이둘리나 등 현대 작곡가를 발굴해 음악계에 알렸다. "젊은 연주자들이 음악을 깊이 공부하기보다 마케팅의 힘으로 단숨에 스타가 되려고 한다"며 쓴소리도 마다치 않는다. 그러면서도 앙상블과 연주여행 다닐 땐 젊은이들의 식사를 일일이 챙기고, 대형 버스에 단원들과 함께 몸을 싣는다. 그는 최근 시리아 조각가 니자르 알리 바드르의 애니메이션 '동쪽의 그림'에 제작비를 댔다. 동유럽 난민들의 현실을 조약돌로 형상화한 영화다.

"이 넓은 세상에서 내가 하는 연주는 대양(大洋) 속 한 방울. 나의 성공과 행복만 좇는다면 부끄러울 거예요. 나는 바이올린을 멋들어지게 켜는 사람이 아니라 전체주의와 테러에 신음하는 이들의 울음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예술가가 되고 싶거든요."

기돈 크레머&크레메라타 발티카 창단 20주년 기념 월드 투어=31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577-5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