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강부자(76)를 만나기 한 시간 전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 강부잔데요." 어쩌다 직접 전화하셨느냐고 묻자 "그럼 누가 하나요, 내가 하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강부자는 지난 19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연극 '친정엄마와 2박3일'을 공연 중이다. 이 연극은 10년째 매년 올리고 있다. 그는 4월 2일엔 남편 이묵원(79)씨와 금혼식(결혼 50주년)도 올렸다. 지난 17일 서울 청담동 자택에서 만났을 때 강부자는 이렇게 말했다. "소속사나 매니저 없어요. 작품 선택부터 화장이고 의상이고 다 나 혼자 하는 거예요. 그런 걸 누가 대신 해 줄 수 있겠어요?" 그가 웃음을 짓자 눈이 그믐달처럼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매니저도 코디도 없는 56년 연기 인생
1961년 KBS 공채 2기 탤런트로 데뷔한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의상 코디네이터, 메이크업 아티스트, 소속사나 매니저를 둔 적이 한 번도 없다. 방송사 PD들도 그의 집이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 출연 요청을 한다. 작품 선택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대본을 돋보기 쓰고 한 줄 한 줄 읽어내려간 뒤에야 작품 출연 여부를 결정한다. 인물 분석도 대사에 밑줄 긋고 손으로 써가며 목소리는 어떨지 몸가짐은 어떨지 연구한다. 56년간 그래왔다고 했다.
―의상도 직접 준비하세요?
"당연하지요. 그 인물에게 맞는 옷은 당사자가 제일 잘 알아요. 극 중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는 내 결정에 따라 달라지는 거니까요. 이 사람이 학교는 나왔는지, 한글은 제대로 쓸 줄 아는지도 내가 정하죠. 냇가에서 빨래하는 시골 아낙 역할을 할 때는 모시 적삼을, 할머니 역할을 할 때는 고무줄 팬티에 늘어난 고무줄 바지를 입어야 해요. 딱 맞는 걸 못 찾으면 직접 만들고요."
―카메라 앞에 서려면 전문 분장사가 있어야 하지 않나요?
"화장을 거의 안 해요. 촬영을 할 때도 번들거리지 않게 분이나 좀 바르고 말지 두껍고 진하게 화장을 해 본 적이 없어요. 내가 맡아온 연기 자체가 화장이 필요 없는 역할이 많았잖아요. 요즘은 조금만 주름이 생기면 다들 얼굴에 주사를 맞는다대. 나는 필러라는 것도 최순실 사건 때문에 알았어요. 나는 그게 스포츠용품 브랜드인 줄만 알았어. 속눈썹 한 번 붙여본 적 없는 나는 참, 여배우로서는 뻔뻔스러운 빵점 배우지."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방송에 나오고 싶은 게 여자 마음 아닌가요?
"내가 평생 절대 안 하겠다고 다짐한 게 딱 세 가지 있어요. 입술 빨갛게 칠하는 것, 담배 피우는 것, 이혼하는 것. 입술 빨갛게 칠해가지고 나오면 사람들이 입술을 보지 연기는 안 봐요. 요즘 배우들은 맨얼굴 가려가면서 얼굴 예쁜 거 보여주려고 하는데 그게 자연스럽게 연기가 되겠어요? 얼굴을 일그러뜨려가면서 해도 희로애락을 표현하기가 어려운걸요."
20대에 70대 역할 맡아
그는 데뷔 직후부터 노역(老役)을 도맡았다. 처음 출연한 KBS 드라마 '구두창과 트위스트'에서 중매쟁이 역할을 했다. 21세 때였다. 24세에는 25세 위인 김동원(2006년 작고)의 어머니 역할을 맡았고 11세 위 도금봉(2009년 작고) 할머니 역할도 했다. 흑백 TV 시대라 얼굴에 분칠을 하고 검은 주름살을 죽죽 그어 분장을 했다. 언제나 50~70대 역할이었지만 한 달에 녹화 일정이 31번 잡혀 있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그는 그러나 어머니에게만은 어떤 드라마에 출연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어머니보다 나이 많은 역할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연기하는 걸 싫어하셨나요?
"반대하진 않으셨어요. 막내 남동생이 하고 싶어 했는데 이 세계가 얼마나 혹독한지 아니까 내가 못 하게 했어요. 나야 운이 좋고 잘 풀려서 역할이 계속 들어오지만 행여나 남동생이 방송국 와서 조명 한번 못 받고 매일 엑스트라만 하고 있으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어요. 내가 우리 친정어머니랑 아주 닮았어요. 어머니도 내가 연기하는 것은 좋아하셨는데 남동생은 안 했으면 좋겠다 하셨죠."
―왜 어머니에게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않았습니까.
"딸이 탤런트가 돼서 TV에 나오는데 역할이 당신보다 나이 많은 할머니라니. 엄마 입장에서 얼마나 속상하시겠어요. 그런데 사실 내가 연기하는 늙은이는 모두 우리 어머니 모습이에요. 내가 보고 자란 게 어머니이니까 표정이나 말투, 몸동작을 전부 우리 어머니 따라 한 거죠. 사촌들은 내가 드라마에 나오면 '저기 왜 숙모가 나와?' 했었대요."
―무서운 어머니 역할을 많이 하셨잖아요.
"우리 어머니가 아주 깐깐한 분이었어요. 아버지는 내가 탤런트 되기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19년을 우리 집에 살면서 아이들을 키워주셨어요. 그러면 허물없이 지낼 법도 한데 사위가 집에 올 시간이 되면 버선까지 갖춰 신는 분이었어요. 돌아가시는 날까지 머리에 쪽지고 사셨으니까 말 다했지요. 덕분에 우리 남편도 집에서는 반바지나 러닝셔츠 한 번 못 입고 19년을 살았어요. 그런 어머니가 허락하신 유일한 남자가 지금 남편이에요."
―탤런트로 인기가 한창일 때였지요.
"몰려다니던 남자 동기가 셋 있었어요. 최정훈씨와 사미자씨 남편 김관수씨, 그리고 우리 남편. 그때는 이묵원이 아니라 본명인 이재호씨였지. 같은 공채니까 일터에서 마주칠 일이 많은데 틈만 나면 툭 치고 가고 그러더라고. 주변에서 '재호가 부자 좋아하나 보다'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나도 어리둥절했지. 그러다 어머니한테 한번 보여볼까 해서 세 명이 우리 집에 놀러왔어요. 어머니가 '다른 건 모르겠지만 성실하게는 생겼더라' 하시더라고. 선 자리가 들어와도 이런저런 이유로 죄다 퇴짜 놓으시더니만 어머니가 그렇게 한마디 하신 게 허락이었죠."
―어떤 면을 보고 결혼하셨나요?
"남편이 7남매 맏아들이에요. 우리 집에 인사드리고 이제 시어머니를 뵈러 갔는데 서울 정릉에 한 골목길로 나를 데리고 가더라고요. 가는 길에 네 살짜리 꼬맹이가 다 늘어난 러닝셔츠만 입고 아래는 발가벗은 채로 막 뛰어다녀요. 근데 그 아이가 '엄마, 강부자 온다'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남편이랑 24세 차이 나는 우리 막내 시동생이었죠. 집도 아주 어려워서 방 두 칸짜리에 동생들 6명이 쪼르르 앉아 있는데 그때 든 생각이 '아, 내가 상록수의 채영신이가 돼서 이 집 기둥이 돼야겠다' 싶더라고요. 참 나도 철이 없었지(웃음)."
"내가 상록수의 채영신" 하며 결혼
이묵원·강부자 부부는 1967년 결혼해 지난 4월 금혼식을 올렸다. 남편 얘기를 꺼내자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아직도 그리 좋으세요?
"우리 남편이 원조 살인 미소잖아요(웃음). 집에서 남편이랑 TV 보면 연예인들 나와서 서로 '살인 미소'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내가 '웃기지 말라고 해. 원조 살인 미소는 여기 내 옆에 있다' 이래요."
―결혼은 당시로는 좀 늦었지요?
"양가 모두 가난해서 4년을 만나고 겨우 결혼했어요. 연애할 때 잉그리드 버그먼이 출연한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보고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얼굴은 안 되니까 연기라도 저렇게 하고 싶다, 그런 이야기를 주로 했어요."
―결혼 생활은 어땠나요?
“5개년 계획을 세웠어요. 1년 안에 백색전화(개인소유 전화기) 놓기, 3년 안에 집 사기, 5년 안에 자가용(승용차) 장만하기. 첫 신혼집이 전세 10만원짜리 다다미방이었어요. 첫 아이가 기어다닐 때쯤 전세 25만원짜리로 이사 갔고 그 뒤로 조금씩 보태서 이사를 4번쯤 더 다녔어요. 첫 집 장만한 게 이촌동 한강맨션이었습니다. 그때 그 집이 345만원이었는데 보증금 빼고 적금 타고도 80만원이 모자라 빚도 졌죠. 아직 지어지지도 않은 집인데 그 공사장을 남편이랑 매일 지나다니면서 ‘여기가 우리가 살 집이야’ 했었어요. 가난했고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으니 그렇게 하나하나 쌓아온 거죠.”
―방송에서 남편이 바람을 피웠는데 용서했다고 말한 것 때문에 화제가 됐었죠.
“남들 같으면 요란했겠지요. 기자들 불러서 울며불며 인터뷰도 하고 이제 같이 안 산다 그랬을 거예요. 근데 내가 절대 안 하겠다고 결심한 것 중 세 번째가 이혼이에요. 헤어질 거 아니면 용서해야죠. 그리고 이미 그때 내가 남편 호적에 떡 올라가 있었고 우리 첫째가 막 돌 돼서 아장아장 걸을 때였어요. 남편이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인 거지. 오히려 ‘그래, 다른 여자도 만나고 와 봐야 강부자가 역시 낫구나 생각할 거 아니냐’ 싶더라고요. 바람이야 뭐, 샤워하면 그만이죠.”
―톱 여배우로 자존심 안 상했나요?
“그 여자랑 다방에서 팔짱 끼고 나와 택시 타는 것까지 봤는데 열불이 나기는커녕 아무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남편이 사흘 만에 집에 들어와서 나를 붙잡고 바람은 진짜 안 피웠대요. 들어보라면서 설명을 자꾸 하길래 ‘아니 말 안 해도 된다, 됐어요’ 이랬더니 오히려 더 들어보라고 사정을 하더라고. ‘됐어요, 안 들어도 돼요’ 했지. 남편이 아니라니까 믿어야지 꼬치꼬치 캐묻고 거짓말이냐 아니냐 따지고 있을 필요가 있나요. 어느 날 우리 집 문 두드리면서 ‘우리 아부지 찾으러 왔어요’ 하는 애만 없음 됐지 뭐.”
―이묵원 선생님은 이제 연기 안 하시나요?
“미련이 조금 남아 있는지 드라마를 열심히 봐요. 그리고 가끔 섭외 전화가 와요. 그런데 내가 하지 말라고 해요. 내 남편이 행여 방송국에서 홀대받을까 봐. 다들 나한테는 잘하는 척한단 말이죠. 그런데 요즘 세상이 인기 있는 젊은 사람은 왕처럼 떠받들면서 어른 공경은 안 해요.”
국회의원, 내 인생 가장 후회스러운 일
그는 한때 정치에도 발을 들였다. 지난 1993년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국회의원 제의를 그는 수차례 거절했다고 한다. 국회의원을 했던 것이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라고 했다.
―뜻이 없는데 억지로 했습니까.
“나는 내가 국회의원 된 걸 구두 고치러 가서 알았어요. 항상 가는 단골 구둣방에 갔는데 ‘국회의원 되셨데요?’ 하더라고요. 너무 놀라서 ‘네? 뭐라고요?’ 했더니 ‘모르셨어요? 신문에 다 났는데’ 해서 알았어요. 그게 정주영 회장님이 대선 출마하면서 자리가 하나 생겨서 내가 들어가게 된 거예요.”
―정 회장과 잘 아는 사이었습니까.
“정주영 회장님이 최불암씨와 나의 팬이었어요. 정 회장님은 ‘나는 테레비에 나오는 사람은 최불암 선생하고 강부자 선생밖에 몰라요’ 하던 분이었거든요. 어느 날 통일한국당 발기인을 맡아달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뭔지도 모르고 ‘예, 그러겠습니다’ 했지요. 어느 날 신문을 보는데 내가 무슨 당 실세처럼 돼 있는 거예요. 내가 성이 강씨잖아, 발기인 명단에도 1번으로 내 이름이 있던 거죠. 그래서 그때 최고 인기였던 라디오 ‘안녕하세요 황인용 강부자입니다’에서 잘렸잖아요.”
―국회의원이 됐잖습니까.
“내 프로그램에서 잘린 게 더 속상했어요. 심지어 나는 비례대표도 안 하겠다고 손사래 치다가 끄트머리인 8번으로 들어갔어요. 총선 때 7번까지 당선되기에 그렇게 다행일 수가 없더라고요. 결국은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됐지만요.”
―국회의원 생활은 어땠나요?
“내 인생 중에 그때를 제일 후회해요. 국회의원 세비가 당시에 450만원이었어요. 그런데 국회의원 됐다고 뉴스가 나니까 여기저기서 ‘티켓 좀 팔아달라’ ‘불쌍한데 기부해달라’ 이러니까 거절을 못 해서 일주일 만에 70만원을 쓰게 됐어요. 생활비가 없으니까 방송을 안 할 수가 없게 된 거예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남자는 외로워’라는 드라마를 했어요. 그즈음에 박찬종 의원이 우유 광고에 출연했는데 그게 문제가 됐어요. 그래서 안 좋은 소리만 잔뜩 들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차라리 빚지고 살 걸 그랬어요.”
―좋은 점은 없었나요?
“하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맞벌이부부 자녀 어린이집 만들어 준 것. 라디오 진행하면서 들은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어느 부부가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서울 와서 살겠다고 동대문 지하 셋방에다 자리를 잡은 거죠. 일하러 가면서 애들 봐줄 사람이 없으니까 밥상 차려놓고 요강 놔주고 밖에서 문을 걸어 잠갔어요. 그런데 그 집에 불이 나서 애들이 갇혀버렸어요. 애들이 벽을 막 긁었대요. 나가려고, 살려고. 그 이야기를 읽는데 눈물이 줄줄 나더라고요. 그 부모는 얼마나 억장이 무너질까 하면서. 그것만은 내가 꼭 해줘야겠다 해서 상임위 때마다 안건으로 냈죠. 나중에 국회의장 공관이 한남동으로 이사 가면서 여의도에 빈 공간이 생겼는데 그곳에 어린이집을 만들었어요. 국회 속기사들이 나만 보면 고맙다고 했어요.”
―다시 출마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까.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어요.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욕심이 많아서 정치했다고 하는데,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왜 난 이렇게 생겨서 오해를 받을까”
강부자라는 이름을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이 없는 만큼 그를 둘러싼 소문들도 다양하게 떠돈다.
―배우로 일하면서 오해도 많이 받았지요?
“정주영 회장에게 여배우를 소개해주고 중개료를 떼먹었는데 나중에 발각돼서 정 회장이 던진 재떨이에 맞았다, 뭐 이런 지저분하고 황당한 이야기까지 있더라고요.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 여배우가 누군지 나와보라고 하고 싶어요. 대통령이 올림머리 하는 시간까지 밝혀지는 세상에 내 소문은 소문만 있고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아니 땐 굴뚝인데 왜 그런 소문이 돕니까.
“내가 욕심 많게 생겨서 그래요. 왜 나는 이렇게 생겨가지고 그런 모함을 받을까 싶죠. 얼토당토않은 소문이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 할 수도 없고요. 실체 없는 소문이 돌면 자식들한테 미안하죠. 아들이 그때 대학생이었는데 중학생 딸이 오빠에게 이렇게 물었대요. ‘엄마가 정주영 회장한테 재떨이로 맞았어?’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런 소문이 날까 싶었지요.”
―기업인들과 친분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죠.
“돌아가신 이병철 회장님과 정주영 회장님이 팬이라면서 도와줄 게 있으면 말하라고 해도 누구 취직이나 사업이나 입 한번 뻥끗한 적 없어요. 잘나가던 때라 라디오 DJ 출연료만 한 달 700만원이었어요. 조금만 모으면 집 살 수 있었죠. 뭐가 아쉬워서 회장님들한테 구질구질하게 그러겠어요.”
―한동안 방송을 못 한 적도 있었지요.
“나는 정말 의리파예요. 1964년에 KBS에서 TBC(동양방송)로 옮겼는데 TBC가 1980년 KBS로 통폐합됐어요. 그때 TV에 나와 고별사를 읽으면서 눈물을 참을 수 없었어요. 17년 동안 내 청춘을 바친 방송국이 언론 통폐합으로 사라지는데 얼마나 슬픕니까. 그때 펑펑 울었다고 정권에 찍혀서 한동안 일을 못했어요. 그때 이병철 회장님이 ‘강부자가 나를 울렸다’고 하더라고요. 누구는 방송 다시 하려면 윗사람한테 가서 빌라고 해요.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빌어요? 내가 몸이 다 썩어 문드러져도 더럽고 유치하게 살 사람은 아닙니다.”
집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을 보고 있자니 그가 다가와 말했다. “다시 태어나서 남편이랑 다시 결혼하게 되면, 그때는 이묵원이가 바쁜 배우가 되고 나는 덜 바쁜 배우가 되고 싶어요. 나는 다시 태어나도 배우가 되고 싶긴 하거든. 그때는 멜로드라마 주인공도 좀 하고, 불꽃 튀는 삼각관계라든지 그런 역할도 좀 해보고요. 그래도 좀 덜 바쁜 배우가 돼서 남편 의상도 챙겨주고 스케줄도 봐주고 졸졸 쫓아다니면서 그렇게요.” 그의 눈이 이번엔 초승달처럼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