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자기 친구가 운영하는 특정 사학법인이 수의학부를 신설할 수 있도록 문부과학성에 압력을 넣었다는 증언이 나와 일본 정계가 발칵 뒤집혔다. 아베 총리는 지난 3월에도 오사카에 있는 한 극우 사학법인에 특혜를 줬다는 의혹에 휘말렸다. 불과 두 달 간격을 두고 같은 일이 더 큰 규모로 또 터진 셈이다. 더구나 이번에는 사건의 내막을 폭로한 사람이 넉 달 전까지 문부과학성 차관으로 근무한 고위 공직자였다.
문제의 사학법인은 일본 중부 오카야마현에 있는 '가케(加計)학원'이다. 이 학원 이사장 가케 고타로(加計孝太郞·67)는 아베 총리의 30년 지기로, 아베 총리가 재집권에 성공한 뒤 5년간 14차례나 회식도 하고 골프도 했다. 부인 아키에 여사도 여러차례 동석했다. 아베 총리를 지척에서 보좌하는 핵심 참모를 빼면, 이 정도로 총리와 격의 없이 사석에서 자주 어울리는 사람은 손으로 꼽을 수 있다.
지난 3월 오사카에 있는 모리토모학원이 아베 총리 부인 아키에 여사를 명예교장으로 내세워 국유지를 헐값에 사들인 사실이 들통난 게 발단이었다. 야당과 언론이 모리토모학원 스캔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가케학원에도 불똥이 튀었다. 야당 의원들이 국회에서 "모리토모학원뿐 아니라 가케학원이라는 곳도 총리 덕에 숙원을 풀었다던데 사실이냐"고 아베 총리를 추궁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케학원은 산하 오카야마 이과대학에 수의학부를 세우는 사업을 수십 년간 추진해왔다. 문부성이 "수의사 수가 과도하게 늘어나면 안 된다"며 학부 창설에 빗장을 걸어 잠가 모두들 '안 되는 일'이라고 여겼는데, 작년 11월 문부성이 돌연 입장을 바꿔 52년 만에 처음으로 '수의학부 신설 허가'를 내줬다.
문부과학성은 "오카야마 이과대가 있는 일본 중부 시코쿠(四國) 지방엔 수의학부가 없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야당과 언론은 "그게 말이 되냐"고 따졌지만 의혹만 무성하고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16일 아사히신문이 이 사건과 관련한 문부과학성 회의 자료를 입수해 공개하면서 사건은 다시 불이 붙었다. 이 자료는 A4 용지 8장 분량으로 총리 직속 내각부와 문부과학성 관리들이 수차례 협의한 기록이었다. 내각부 고위 관리 2명과 문부성 실무 공무원 4명의 실명도 들어 있었다. 공문이 작성된 시기는 작년 2016년 9월로 수의학부 신설 허가가 나기 두 달 전이다. '총리의 의향이다', '이번 일에 안 된다는 선택지는 없다. 사무적으로 빨리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책임을 지게 된다'는 문구 등이 들어 있었다. 이에 대해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출처 모를 공문이고, 사실과 전혀 다르다"면서 의혹을 부인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시사 잡지 주간문춘이 25일 "이 문건은 문부성 직원들이 만든 공문이 맞다"는 마에카와 기헤이(前川喜平) 전 문부과학성 사무차관 단독 인터뷰를 내보냈다. 마에카와 전 차관은 "내각부와 문부성이 작년 9~10월 6차례 만나 협의하며 만든 공문"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문부성이 압박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라고 했다. 그는 아사히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도 "문부성 관리들이 '농림수산성이나 후생노동성 같은 관련 부처에 물어봐도 수의사가 부족하다는 데이터가 전혀 없다'고 하자, 내각부가 '톱 다운으로 정하는 일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밀어붙이더라"고 했다. 제1야당 민진당은 이날 마에카와 전 차관을 국회에 소환해 경위를 따지겠다고 당론을 정했다.
아베 총리는 지난 3월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이 문제를 처음 꺼냈을 때 "개입하지 않았다"며 "내가 압박했다고 밝혀지면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상당한 정치적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일본 정계는 보고 있다.
아베 총리의 자민당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만든 신당의 맹추격을 받고 있다. 이번 스캔들은 이 선거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아베 총리의 지지율이 하락하면 하반기부터 본격화될 개헌 정국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