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현 셰프의 추억이 묻어나는 9가지의 면요리와 추천하는 각 요리별 맛집을 소개한다.
쌀국수, 국제적으로는 포(pho)라고 부르는 이 고기 국수를 나는 사랑한다. 아무리 부어라 마셔라 해도 다음 날 숙주 듬뿍 넣은 쌀국수 한 그릇이면 개운한 위장과 함께 또 새로운 날을 산다. 베트남은 해장의 명약인 쌀국수의 원조이자 메카다. 거리 곳곳에 쌀국숫집이 넘쳐난다. 이 사람들은 온종일 쌀국수만 먹고 사는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들 정도로 쌀국숫집이 많다.
그러나 강호에 아무리 고수가 많아도 그중 최고는 있는 법, 차고 넘치는 호찌민의 쌀국숫집 중 꼭 가야 할 곳이 있다. 이름은 포호아(PhoHoa Pasteur), 국내에 있는 체인점과 헷갈리지 말자. 이 포호아는 전 세계에 호찌민 파스퇴르(Pasteur) 거리 한 곳뿐이다.
"가족 비즈니스지. 온 가족이 함께 일해."
뉴욕타임스에도 소개된 포호아를 이끄는 것은 미스터 린(Mr. Linh)이다. '포호아'는 3층 건물이다. 1층은 주방과 홀, 2·3층 건물 전체에 현지인, 여행객이 가득하다. 테이블 가운데에는 한국에서 찾기 힘든 타이 바질(thai basil)과 대나무 잎사귀 비슷하게 생긴 쿨란트로(cu lantro), 초록 라임이 쌈밥집에 온 것처럼 한 상 깔려 있다. 이제 선택의 순간이다. 뭘 먹을 것인가? 닭고기로 만든 포가(pho ga)도 좋지만 역시 가장 만만한 것은 쇠고기 쌀국수 포(pho)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자태, 한국과 달리 숙주는 육수에 한번 데쳐서 가지고 온다. 한 숟가락 국물을 맛보니 익숙한 맛인데 뭔가 다르다. 한국의 쌀국수 맛이 CD로 듣는 음악이라면 베트남 포호아 쌀국수의 맛은 눈앞에서 펼쳐진 라이브 음악이다. 베트남 쌀국수의 생생함은 몸으로 느끼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종류다.
짙은 풍미의 소고기는 부드럽고 열대에서 자란 허브 향은 힘이 넘친다. 레몬보다 산도가 더 높은 라임을 뿌려 신맛을 더하니 맛이 더욱 다채로워진다. 감히 말하건대 그것은 완벽한 한 그릇이다. 그리고 절로 '내 쌀국수 어디 간 거야?'를 외치게 되는 찰나의 순간이다. ▷기사 더보기
대전역에 들어선 무궁화호 열차는 서서히 속력을 늦췄다. 가을로 향해 가던 밤, 조금 더 날이 지나면 숨을 쉴 때 입김이 얇게 서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0년도 더 전, 머리가 덥수룩한 장발이 유행이었고 부모님은 지금 나와 비슷한 나이였다. 대전역에서 아버지는 황급히 열차에서 내렸다. 아버지가 다시 열차를 타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나는 창에 코를 박고 아버지 그림자를 쫓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철로 옆 가게 앞에서 잠시 서성이던 아버지는 그릇 하나를 들고 열차에 다시 올라탔다. 그날 내가 마주한 것은 가락국수였다. 면이 툭툭 끊기는 그 국수를 몇 젓가락 먹었을까?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는 서울이 아닌 부산에 와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어디론가 떠날 때 가락국수라고 하던 우동을 먹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멸치 따위로 국물을 내고 쑥갓과 고춧가루, 유부를 고명으로 올린 그 국수 한 그릇을 먹어야 길 위에 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국물이 끝내주는' 우동, 혹은 중국집에서 어른 흉내를 내며 시킨 우동,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우동을 오해하며 살았다.
하지만 근래 나는 차갑게 식은 하얀 우동 면발을 앞에 두고 여름을 이겨내는 취미가 생겼다. 우동은 계절을 가리는 음식이 아니다. 특히 우동의 발상지인 일본 관서 지방, 즉 오사카 등지에 가면 거대한 사발에 우동면을 담아 끊지 않고 삼키는 사람들을 매일, 매 절기 볼 수 있다. ▷기사 더보기
나는 레스토랑 면접을 보러 영국에서 호주로 날아온 터였다. 그 사이 호주 멜버른의 한인 게스트 하우스 한구석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8인실 숙박비는 일주일에 80달러밖에 하지 않았지만 통장 잔액은 서서히 '0'에 가까워졌다. 파마머리를 한 게스트 하우스 사장은 나를 딱하게 보고 은근히 물었다.
"샌딩(sanding)하는 데 보조가 필요하다는데…."
샌딩이란 나무 마루 칠을 사포로 벗겨내는 것이다. 여기에 왁스로 덧칠하면 작업이 끝난다. 8시간 노동이 끝나고 차 안에서 100달러를 받았다. 나는 100달러를 주머니에 넣고 차에 몸을 실었다.
우리는 얼마 후 한인 중국집에 도착했다. 먼지를 내린다는 핑계로 탕수육과 짬뽕, 소주를 시켰다. 주문을 받은 주방에서 촤악 촤악 중화 냄비 돌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짬뽕 볶는 소리였다. 한눈에도 잘 볶아 빨간 고추 기름이 밝게 빛나는 짬뽕이 김을 내며 탁자에 놓였다. 적도 너머, 호주에서 짬뽕 한 숟가락에 소주 한잔을 마셨다. 뜨겁고 찡한 것이 식도를 타고 흘러내렸다.
민박집에 머물며 이른바 '노가다' 보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일이 없는 날이면 그 짬뽕 흉내를 내려 주방에서 칼을 잡았다. 짬뽕은 오래 준비하고 빨리 요리하는 음식이다. 어떤 음식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짬뽕은 특히 재료 준비에 공을 들여야 한다. 이른바 '슬(絲)'이라 하여 재료를 잘게 채 써는 것이 짬뽕의 기본이다.
일정한 두께로 썰어야 익는 시간이 균일하다. 이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살이 단단한 노계(老鷄)로 육수를 우려 깊은 감칠맛을 내는 것은 공공연한 비법이다. 이렇게 재료 준비가 끝나면 찰나의 순간이 남는다. 집에서 짬뽕을 끓이게 되면 그 맛을 흉내낼 수 있을지언정 온전한 맛을 낼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이 순간에 있다.
문제는 화력(火力)이다. 웍(wok)이라고 하는 중화 냄비 바닥은 두께가 3㎜밖에 되지 않는다. 그 바닥을 데우는 프로판가스의 열은 섭씨 1000도를 쉽게 넘어간다. 열 전도율을 높이기 위해 바닥을 최소한으로 얇게 만든 것이다. 둥근 반원 모양 웍 속에서 재료를 흔들면 위로 튀면서 뜨거운 증기에 익고 바닥에 내려오면 다시 초고온 열에서 독특한 탄맛을 내게 된다. 쉽게 말해 이 '탄' 정도를 얼마나 섬세하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맛이 확연히 달라진다. 대중이 이야기하는 불맛의 정체다. ▷기사 더보기
엉덩이가 아플 정도로 버스를 탔다. 혹시나 버스 정류장을 놓칠세라 잠도 잘 수 없었다. 한 시간 넘게 지났을 때, 어머니가 종이에 적어준 정류장 이름이 들렸다. 나는 동생 손을 붙잡고 버스에서 내렸다. 아버지가 구두가게를 접고 새로 시작한 당구장은 낡은 상가 건물 2층이었다.
"밑에 중국집 가서 시켜 먹고 있어. 당구장에서 왔다고 하면 돼."
"밑이요?"라고 되물었지만 "응, 거기"라는 간단한 답이 되돌아왔다. 우리 형제는 어둑한 당구장 계단을 내려갔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한 사내가 주방에서 빠져나와 말을 걸었다. 그는 중국집 주방장이었다. 당구장에서 왔다는 말에 그는 우리를 반기며 탁자 앞에 앉혔다. "뭐 먹을래?"라는 말이 뒤이었고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짜장면 안 좋아하나? 느그들 유니짜장이라고 먹어봤나? 그게 맛있다. 기다리봐라. 내가 후딱 해줄게."
남자는 혼자 묻고 답하며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처억 처억 중화 냄비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홀 안으로도 고소한 짜장 냄새가 새어 들어왔다. 몇 분 뒤 사내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유니짜장 두 그릇을 들고 왔다. 고기를 갈아 넣었다는 뜻의 유니(肉泥·고기 진흙)짜장은 말 그대로 고기 간 것과 채소 잘게 다진 것을 춘장과 함께 볶아낸 짜장의 한 종류다.
매번 걸쭉하게 비빈 짜장면만 먹다 맞이한 유니짜장은 새로운 맛이었다. 무엇보다 주방의 열기가 그대로 담긴 짜장면은 배달로 먹는 것과 완전히 다른 종류였다. 식고 불어버린 배달 짜장면은 텔레비전 재방송처럼 싱싱한 느낌이 없었다. 그러나 바로 볶아 나온 짜장면은 나무에서 갓 딴 과일처럼 살아 있었다.
생동하는 향은 살아 꿈틀거리는 뱀처럼 콧속을 파고들었다. 게다가 재료를 잘게 다져 볶아낸 유니짜장은 더욱 고소했다. 잘게 썬 재료는 혀를 집요하게 자극했고 갈린 고기는 묵직한 맛을 냈다. 유니짜장은 아는 사람만 시키는 중국집의 비밀 같았다. ▷기사 더보기
나는 하얀 소면(素麵)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저걸 먹을 것인가? 한참 전에 삶아 놓은 소면은 입에 넣자마자 툭툭 끊길 것이고, 국물로 준비한 멸치 육수는 보나마나 맹탕일 것이 분명했다. 뒷사람이 눈치를 줄 찰나, 나는 선택했다. '먹자.' '결혼식엔 잔치국수'라는 레퍼토리를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생각보다 꽤 괜찮은 멸치 육수였다.
쓴맛 없이 은근히 달고 간도 적당했다. 그리고 소면에 탄력 없음을 누구에게 탓할 것인가? 이렇게 많은 인원을 그 단가에 먹이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 오히려 고집 없는 소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 그 부드러움에 3시간 남짓 열차를 타고 온 여독이 풀리는 것만 같았다.
잔치국수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외로운 음식이 아니다. 대신 무언가를 축하하는 흥겹고 귀한 음식이다. '국수'라는 음식 속성이 원래 그렇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한반도에서 밀은 예부터 귀한 작물이었고, 밀을 갈아 만든 밀가루는 더더욱 그랬다. 지금처럼 국수가 흔해져 포장마차에서도 팔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파는, 배 주린 이가 가장 싸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된 것은 최근 일이다.
알고 보면 이 소면은 일본 것. 조선시대에는 왜면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대구에 기반을 둔 가장 오래된 국수 회사 '풍국면'(대표 최익진)은 이제 그 역사가 83년으로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그 근본을 따지자면 우리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잔치국수의 연원이 비록 일제시대지만 그 이후 이 땅에서 많은 이의 허기를 달랜 것 역시 명백한 역사. 그 역사는 지금도 이어져 잔치국수는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여전히 값은 싸고 여전히 양은 복되다. ▷기사 더보기
나는 막국수 문화권에 있었다. 때는 스물일곱 살 봄이었다. 20대에 마땅히 한 번은 해봐야 한다는 생각에 무작정 도보 여행을 떠났다. 출발지는 홍천, 목적지는 설악산 너머 속초였다. 총 100㎞ 되는 그 길에서 나는 수도 없이 많은 막국수 집을 목격했다. 굳이 지도를 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어느 순간 국도변에 막국수 집이 등장하면 그것은 강원도에 있다는 의미, 최소한 근처에 있다는 뜻이다.
막국수는 집에서 구하기 쉬운 동치미 국물에 강원도에 많이 자라는 메밀로 만든 투박한 메밀면을 말아 먹던 것이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지금 이토록 강원도에 막국수 집이 많은 것은 강원도에 내국인이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 카지노가 들어선 것과 비슷한 사연이 있다.
1981년 열린 그 시대 대표적 관제 행사 '국풍81'에 춘천의 대표 음식으로 막국수가 소개되면서 막국수는 강원도의, 특히 춘천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여행을 떠나요'를 부르며 80년대 호황을 누릴 무렵, 컬러 텔레비전 시대의 미디어들은 춘천 막국수 집을 경쟁적으로 담아갔고 20여 년 전인 1995년부터는 춘천 막국수 축제가 열리기 시작했다.
제2회 춘천 막국수 축제에서 명가로 선정된 후 아예 이름을 바꾼 '명가 막국수'에 가면 우선 가족 단위 손님이 많은 것이 눈에 띄는데 대부분은 관광객이다. 남녀노소, 특히 외지인을 끌어들이려면 필연적으로 맛이 강해진다. 이 집의 막국수에는 참기름과 달콤한 양념장, 고소한 김 가루가 듬뿍 올라가 있다. ▷기사 더보기
"점심에는 국수 좀 먹읍시다."
국수를 밥보다 좋아하던 할아버지는 날이 좀 무덥다 싶으면 할머니에게 이렇게 넌지시 말을 했다. 할머니의 답은 비슷했다.
"아니 또 국수는 왜 국수예요. 어제도 먹었잖아요."
아마 밥을 먹어도 비슷한 답이 나왔을 것 같았지만, 어쨌든 늘 불평을 늘어놓아도 저 말이 나온 점심에는 어김없이 하얀 국수가 삶겨 나왔다. 우리는 안방에 딸린 반들반들한 마루에 앉아 식사를 했다. 하얗다고 하여 소면이라고 부르는 국수를 먹는 방법은 늘 비슷했다. 할머니는 늘 물김치를 담갔다. 오이, 배추, 무 등 김치의 재료는 달랐지만 오미자를 푼 듯 맑고 투명한 붉은 국물이 깔려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물김치 국물을 반질반질한 스테인리스 대접에 옮겨 담고 할아버지는 삶은 국수 두 덩이 정도를 휘휘 저어 푼 다음 입이 터질 것처럼 그 하늘하늘한 가닥을 입에 밀어넣었다. 그리고 국수를 채 목구멍으로 넘기기 전에 대접째 들어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마셔버리는 것이었다.
막혔던 것이 뚫어져 내려가듯 소리를 내며 그 대접을 작은 소반에 내려놓고 할아버지는 입을 쓱 훔쳤다. 먼저 소주 한 잔을 들이켠 다음이었다. 아마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선주후면(先酒後麵)의 정신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이북 황해도 출신이던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먼저 그릇을 비우고 일어서면 국수 가락을 보며 옛 고향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기사 더보기
칼국수를 사 먹기 시작한 것은 어른이 되고 나서다. 그전까지 칼국수는 당연히 집에서 해 먹는 음식이었다. 어쩌다 한 번 칼국수가 점심 메뉴로 정해지면 일단 신문지부터 찾았다. 반죽할 때 하얀 밀가루가 사방으로 튀었기 때문이다. 요리에 청소까지 곁들여지는 이 작업을 달가워할 주부는 드문 것이 당연하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기분과 칼국수는 매우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다.
칼국수에는 특별한 재료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칼국수 아닌가? 문제는 반죽이었다. 집에서 하는 밀가루 반죽에 정해진 조리법이 있을 리가 없다. 눈대중으로 대충 물을 잡고 반죽을 치댔다. 말이 쉽지 사실 반죽에 한평생을 바치는 장인들이 있을 정도로 따지고 들어가면 재료 비율부터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우선 물과 밀가루 비율은 밀가루 자체가 머금은 수분, 습도, 온도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여기에 반죽에 넣는 소금, 전분, 소다 등에 따라 물성은 천차만별이다. 보통 물과 밀가루 비율은 무게비로 1:4 정도 잡는다. 조리법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흔히 이야기하는 탄력 있는 면발은 이쯤이 좋다. 글루텐 함량이 높은 강력분을 쓰면 더욱 탄력 있는 면발이 나온다. 하지만 그 비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금 유무다.
무턱대고 싱겁게 먹겠다며 반죽에 간을 약하게 하거나 아예 빼버리면 면의 탄성이 훨씬 줄어들고 맛 또한 덜하다. 넣는 양은 반죽 분량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반 숟가락이면 충분하다. 반죽을 치대는 정도는 대략 손에 끈적한 기운이 묻어나지 않을 때까지다. 이후 최소 30분 정도는 숙성시켜야 탄성이 살아난다. 반죽하면서 피로해진 글루텐이 다시 힘을 얻기까지 시간이 필요해서 그렇다. 그동안 할 일은 칼국수 면발에 얹혀질 육수와 고명을 만드는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바지락 칼국수를 즐겨 먹지 않는다. 어머니 칼국수에 익숙해진 까닭이다. 우리 집은 무조건이라고 해도 될 만큼 닭칼국수만 해서 먹었다. ▷기사 더보기
봄에는 천하무적이었다. 특히 식목일 직전에 열리는 시범경기는 '이렇게 잘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그 걱정은 늘 현실이 되었다. 한철 피고 지는 벚꽃처럼 부산 자이언츠의 순위는 기온이 올라갈수록 급격한 하강 곡선을 이뤘다.
어린 나는 거의 매일 헛된 꿈을 품고 텔레비전 앞에 죽치고 앉아 9회를 꼬박 채웠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며 주방에 서서 안 보이게 혀를 찼다. 허망한 패배에 끌탕을 하고 있으면 어머니는 한겨울을 나고 남은 김장 김치를 잘라 양념을 묻혔다. 작은 가스레인지 위 큰 냄비에는 물이 끓고 있었다. 잠시 뒤에는 큼지막한 대접에 빨간 비빔국수가 담겼다.
어머니의 비빔국수는 다른 집 것과 달랐다. 신맛과 단맛, 매운맛의 균형을 잡아 맛을 내는 여타 비빔국수와 달리 우리 집 비빔국수는 매서운 직구처럼 매운맛이 강했다. 김치가 듬뿍 들어가는데 고춧가루도 한껏 집어넣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매운맛 뒤로 도는 묵은 김치의 신맛은 다음 젓가락을 부르는 마법이었다. 여기에 양파도 송송, 땡초라고 부르는 매운 고추를 더 썰어 넣었다. 나는 매운맛 영재 교육이라도 받듯 이 매운 비빔국수를 입에 밀어넣었다. 얇은 소면이 뱀처럼 혀를 감쌌다. 고춧가루가 독처럼 신경을 자극했다. 눈물이 나고 땀이 흘렀다. 나는 기어코 "매워, 매워!" 를 외치며 혀를 내밀고 냉수를 몇 잔 들이켜게 마련이었다.
그렇게 정신이 쏙 나갈 정도로 매운 비빔국수 한 그릇을 먹고나면 야구 생각은 사라졌다. 그깟 야구, 그래 봤자 공놀이라는 꽤 어른스러운 생각도 하면서.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