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번 수소, 2번 헬륨, 3번 리튬….'

'4월 30일 토요일 아침 식빵과 케첩과 치즈, 수프, 야채 샐러드, 두유, 점심 돈육김치찌개, 생선묵볶음, 쥐어채무침….'

이런 걸 읽어주는 남자들이 있다. 클래식 FM 라디오 진행을 주로 맡아온 KBS 배창복·이상협 아나운서가 팟캐스트 '오디오 진정제'를 진행한다. 원소 주기율표, 서울구치소 식단, 박카스 성분, 서울 지하철 3호선 역 이름, 불닭볶음면 조리법 등 정확하고 차분한 저음으로 무엇이든 읽어준다. 세상 풍파에 지친 귀를 진정시켜 주는 '고막 아재'(연인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달래주는 가수라는 뜻의 '고막 여친'을 바꾼 말)가 되어주겠다고 나섰다.

배경음악 선곡에도 공을 들인다. 오페라 아리아, 대금 산조처럼 격조 높은 음악이 깔리면 마음이 차분해지다가도 웃음이 터진다. '오디오 수면제'라는 제목을 달고 양 한 마리부터 백 마리까지 세어주기도 한다. 지난달 말 방송을 시작하자마자 팟캐스트 포털 문화·예술 분야 1위에 올랐다.

KBS 디지털 콘텐츠팀에서 사내 공모해 당선된 아이디어다. KBS 라디오 PD와 다큐 작가까지 참여해 KBS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녹음한다. 위트 넘치는 팟캐스트를 공영방송 제작진이 정색하고 만든다는 게 또 하나의 웃음 포인트. 이상협 아나운서는 "늘 읽는 일을 하다 보니 '아무거나 읽어주는 방송이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아나운서는 뭘 읽어도 그럴싸하게 들리는 낭독의 모순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이런 것도 읽어달라"는 청취자 요청이 많다. 노래 가사, 명함, 나이트클럽 전단 등등. '스마트폰도 없는 내가 이거 들으려고 난생처음 팟캐스트 들어봤다' '남편이 코를 골아 이어폰 꽂고 오디오 진정제 들으며 진정했다' 같은 댓글이 쏟아진다.

이상협 아나운서는 "한 명이라도 웃음이 터지면 진행할 수가 없기 때문에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하지만 개명 신청자 명단을 읽을 땐 정말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마진가, 지자랑, 변기통, 지애미, 문문문, 어흥….' 앞으로 '오디오 소화제', '오디오 총명탕' 등 자매품도 만들어낼 계획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