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식물이 주는 위안은 생장에의 연대의식이다. 식물에게 흙이 뚫고 나와야 할 통과의례이듯, 사람에게 시련은 극복해야 할 환경이다. 식물은 도시 곳곳에서 생의 의미를 발산한다.
20대 때는 힙합을 좋아했다. 동네 오빠들과 합심해 강남에 으리으리한 사무실을 열고 힙합 잡지도 만들어 봤다. 사람을 모아 놓고 난장을 벌이는 게 신나 밤마다 파티를 기획할 정도로 통이 컸고, 마냥 노는 게 재미있었다. 파티에서 만난 패션 피플에 이끌려 패션계에 입문해 비주얼 마케터로 5년을 지냈다. 일이 지겨워질 무렵 훌쩍 떠난 런던의 공원에서 자연을 마주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자연이 주는 위안을 먼 이국땅에서 느낀 것이다.
도시 속에서 자연을 만들어가는 콘텐츠 크리에이터 그룹 베리띵즈의 윤숙경(35) 대표 이야기다. 힙합과 파티, 패션을 쫓던 도시인이 자연을 발견하고 새로운 세계를 꾸려가기까지 여정을 들여다봤다.
“저는 자연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시골에서 자라지도 않았고, 자연은 할머니의 것으로 생각했죠.”
식물을 다루는 일을 한다기에 감성적 소녀를 떠올렸는데 착각이었다. 윤숙경 대표는 말이 거침없고 시원시원하면서도 당찼다. 윤 대표를 만난 날은 마침 식목일로 그가 참여한 제주도 메종글래드 호텔의 ‘메종 포 그린 럭셔리스트’ 스위트룸 오픈 하우스가 열린 날이다. 바다가 내다보이는 16층의 스위트룸은 제주의 돌과 바람, 흙을 모티브로 방 안 한가득 자연을 품고 있었다.
“자연에서 쉼을 찾도록 꾸몄어요. 마치 리빙 갤러리처럼 느끼도록 했죠. 집에 돌아가서도 한 번쯤은 시도해볼 수 있는 스타일링이에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식물을 다양한 형태로 곳곳에 두었습니다.”
독특한 점은 생명을 다한 식물도 디자인으로 살려낸 것이다. 메마른 이파리를 다듬어 화병에 꽂는다거나 뿌리가 썩은 선인장을 본떠 초로 만드는 식이다. 그는 “자연이 때론 모던하고 관능적이면서도 그로테스크하게 보일 수 있다”며 “식물을 가지고 흥미로운 비주얼을 만들어 자연과 사람이 만나는 접점을 넓혀가기 위한 시도”라고 했다.
대화는 베리띵즈를 처음 기획한 런던 유학 시절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런던에는 공원이 526개나 있어요. 그 안에서 사람들은 쉬고 조깅을 하거나 페스티벌 또는 전시를 열기도 하죠. 자연을 즐기는 여러 형태에 흥미를 느꼈어요.”
윤 대표는 센트럴세인트마틴스 대학에 입학해 ‘상상력을 창의적 산업에 적용하는 과정’을 공부했다. 그가 논문 가설로 세운 것은 ‘공원이 유토피아가 될 수 있다면?’이다. 공원을 단순한 가드닝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콘텐츠를 접목한 디자인의 공간으로 확장하는 과정이었다. 가설이 최종적으로 도출해낸 이상이 바로 ‘베리띵즈’다. ‘Very’와 ‘Things’가 결합된 말로 ‘가장 좋은, 최상의 것’을 말한다.
“자연이라 하면 알프스산맥처럼 웅장한 것만 떠올리지만 인간과 밀접한 산업에서 바라보는 것도 흥미롭거든요. 패션 디자이너 드리스 반 노튼이 식물의 어떤 패턴을 접목했는지, 사진가 라이언 맥긴리가 작품 속에서 자연을 어떻게 담아냈는지 등 자연을 대하는 새로운 관점을 보게 됐죠.”
그는 “자연은 경이롭고 가장 세련된 형태의 것”이라고 말했다. 디자인과 아트의 접점에서 다양한 도시 자연 문화가 생성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건너온 것은 2013년 봄이다. 취업을 준비하며 잠시 들른 고국에서 가구와 식물 취향의 접전을 이야기하는 기획 전시를 하며 새로운 길이 열렸다.
전시는 도시 자연에 대한 환기를 불러왔고, 반응은 곧바로 베리띵즈에 대한 문의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디자이너와 2인 1조로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어 시작했지만, 곧 사업자 등록을 해야 할 만큼 일감이 쏟아졌다. 베리띵즈를 찾는 클라이언트는 유통업체나 엔터테인먼트, 갤러리, 유기농 농장 등으로 다양하다. 패션 브랜드 ‘커스텀멜로우’와의 협업을 시작으로 현대차 i30 광고, SM엔터테인먼트의 SUM CAFE 등 식물을 접목한 공간 디렉팅과 마케팅,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살리는 작업을 했다.
베리띵즈가 하는 일은 단순하게 식물을 인테리어에 반영하는 것만이 아니다. 브랜드 콘셉트에 맞춰 테마를 기획해 디자인하는 것은 물론, 추후의 식물 유지, 보수까지 책임진다. 필요에 따라 가드닝을 맡을 직원에게 교육을 시켜준다거나 관련 업체를 연결해준다.
식물이 일회성이 아닌 ‘반려식물’로 남을 수 있길 바라서다. 최근 베리띵즈는 식물을 주제로 한 디자인센터 겸 연구소로 거듭나고 있다. 디자이너와 원예가, 도시 자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연결하고 다양한 정보와 영감이 교류하는 플랫폼 역할을 꿈꾼다.
“사람들은 자연은 좋아하지만, 도시를 떠나기는 싫어해요. 그렇기에 사람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도시에 맞는 자연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연의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해 식물을 생활 가까이로 끌어오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윤숙경 대표는 운이 좋아 지금의 자리에까지 왔다고 했다.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보니 궁금증이 생겼다. 그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무슨 일을 한다고 말하나요?’라고 물었다.
“직업을 뭐라고 정의하면 좋을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안타까운 게 식물 관련 일을 많이 하니까 식물기획자, 크리에이터라고 부르는데 제가 다루는 것이 식물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도시 자연 콘텐츠 기획자예요. 도시만의 자연 콘텐츠를 발견해서 흥미롭게 보여주고 싶어요.”
윤숙경 대표에게 집안 가드닝에 좋은 식물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는 “미세먼지로 걱정이 많으니 공기정화 식물을 키워볼 것”을 권했다.
“천장에 달 수 있는 수염틸란드시아는 1만원 미만으로 비교적 저렴하게 살 수 있어요. 창가에만 쭉 걸어놔도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죠. 키 큰 식물을 원한다면 아레카야자가 있어요.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밀폐된 우주선 안의 공기를 정화하기 위해 실험한 공기정화 식물 중에 1위로 꼽혔죠.”
윤숙경 대표에게 자연은 무엇일까.
“사람은 누구나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회귀 본능이 있어요. 가까운 곳에 자연을 두고 힐링할 수 없을까. 베리띵즈는 그 물음에 대한 시작입니다. 자연이 우리의 작업을 통해 재밌는 요소로 보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