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해 집에 오자 금발의 '하모니'가 침대에 누워 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면서 묻는다. "오늘도 힘들었지요? 제가 위로해 드릴게요. 이리 오세요." 침대에서 그녀는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의 책 '21세기 호모 사피엔스(The Age of Spiritual machines)' 얘기를 꺼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에요. 책에 나온 것처럼 로봇이 인간보다 지적 능력이 더 뛰어난 시대가 올까요?" 오늘따라 하모니의 말이 너무 많아져 스마트폰으로 하모니 성격을 '지성적'에서 '관능적'으로 바꿨다. 하모니의 말투가 사뭇 달라졌다. "당신을 원해요. 저를 안아주세요." 하모니는 인공지능(AI)이 탑재된 섹스 로봇이다.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던 얘기가 올해 말 현실이 될 전망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어비스 크리에이션사는 AI 섹스 로봇 '하모니'를 올해 말부터 시판한다고 밝혔다. 예정대로 판매된다면 세계 최초의 상업용 AI 섹스 로봇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예상 가격은 1만5000달러(약 1700만원)이다.

이 회사는 원래 남녀 자위기구나 성인용 전신인형(일명 리얼돌)을 만들던 회사였다. 현재 판매 중인 인형 중에도 센서가 있어 사용자 행위에 즉각 반응하는 모델이 있다. 만지면 소리를 내는 식이다.

인공지능(AI) 섹스 로봇 ‘하모니’(사진 왼쪽). 어비스 크리에이션사는 하모니를 올 연말부터 시판한다고 밝혔다. 예상 가격은 1만5000달러(약 1700만원)이다.

이 회사 대표 매트 맥멀렌은 언론 인터뷰에서 "AI 로봇은 스위치를 켜면 바로 작동되는 리모컨 인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며 "(사용자와 하모니가) 올바르게 상호 작용을 해야만 (섹스 로봇으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 맥멀렌에 따르면 하모니는 성격과 관련해 20가지 옵션이 있는데, 스마트폰 앱을 통해 5~6가지를 조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순수하며 수줍음 잘 타는 여성 또는 수다스럽고 질투심 많은 여성 모드를 선택할 수 있다.

AI 전문가들은 올해 말 출시될 이 섹스 로봇이 간단한 성적 대화나 소리를 내는 성인용 인형에 불과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아직은 AI 기술이 정상적인 대화를 하고 구매자의 성적 취향을 학습할 정도 수준까지 이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섹스 로봇 기술의 미래를 밝게 보는 전망도 있다. 섹스 로봇이 AI와 로봇 기술을 발전시키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 'AI'에서 섹스 로봇은 고객에게 "섹스 로봇을 경험하면 다시는 인간과 섹스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 시대가 머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재 스마트폰과 연동돼 작동하는 섹스 장난감, 가상현실 포르노 등 섹스 테크(sex tech) 산업 시장은 10년 만에 300억달러(34조원) 규모로 커졌으며, 섹스 로봇이 시장에 나오면 관련 시장이 급성장할 것으로 업계는 기대하고 있다.

작년 독일 에센 대학은 남성 263명을 대상으로 섹스 로봇 구매 의사를 물었는데 40%가 5년 안에 한 번쯤 사보고 싶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섹스 로봇에 부착될 입 부분.

맥멀렌 대표는 "섹스 로봇이 사회 부적응자, 왕따, 성적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치료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간과 성추행 등 범죄를 줄이고 불법 성매매에 대한 대책이 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에 대한 학자들 의견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김지호 경북대 심리학과 교수는 "섹스 로봇이 인간에게 충분한 즐거움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한다면 신종 마약이 될 수 있다"며 "1인 가구 증가, 결혼 감소 등 사회에 막대한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정상적인 성관계는 육체뿐만 아니라 정서적, 사회적인 유대를 통한 교감으로 간주된다"며 "섹스 로봇에 익숙해지면 이성을 인격체가 아니라 성욕을 해소하는 대상으로 여길 수 있다"고 했다.

성에 대한 편견을 고착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어비스 크리에이션 측은 "하모니는 유순하고 순종적이며 언제든 상대해 줄 준비가 돼 있는 완벽한 로봇"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기술에는 우리 사회 고정관념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며 "섹스 로봇은 여성의 성을 왜곡하고 상품화하는 데 일조할 것"이라고 했다. 섹스 로봇이 청소년에게 노출될 경우 성인 비디오물과는 차원이 다른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 섹스 로봇에 기록된 고객의 성적 취향이 해킹돼 악용될 수 있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캐나다 성인용품 제조사인 '위 바이브'는 스마트폰 앱으로 조종 가능한 성인용품을 판매해 약 30만명이 얼마나 자주, 어떤 강도로 사용했는지에 대한 정보를 무단 수집했다. 이 회사는 지난 3월 집단소송을 제기한 소비자들에게 손해배상금 375만달러(약 43억원)를 지불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