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2월 새한정기라는 중견 회사가 용어조차 낯선 주가 부양 계획을 들고나왔다. 회삿돈으로 자기 주식 5%를 사들여 없애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에서 유행하던 방식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에선 생소했다. 주식을 휴지조각으로 만들겠다니 미쳤냐는 반응도 있었다. 그러나 뒤이어 현대차 등이 따라하면서 자사주 소각은 한국에도 일반화됐다. 작년에만도 자사주 소각이 28건 이루어졌다.

▶소각(消却)이라 해도 종이를 태워 없애는 것은 아니다. 주식 가치를 제로(0)로 만들어 소멸시킨다는 뜻이다. 불에 태운다는 '소각(燒却)'과 한자부터 다르다. 과거엔 폐기된 주식 증서에 구멍을 낸 뒤 실제로 소각장에서 태웠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 주식 실물을 찍지 않는 전자 발행이 일반화됐다. 요즘 주식은 대부분 증권예탁결제원 컴퓨터의 가상공간에 존재한다. 자사주 소각도 디지털신호를 통해 전자 장부상에서 지워질 뿐이다.

▶삼성전자가 파격적인 45조원(13.3%) 자사주 소각안을 내놓자 의아해하는 소리가 적지 않았다. 왜 그 비싼 주식을 없애냐는 것이다. 소각이라지만 45조원이 증발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액수만큼 자산 가치가 회사에서 주주로 넘어갈 뿐이다. 자사주 13%를 소각하면 이론적으로 주가는 13% 이상 올라야 한다. 기업 가치는 그대로인데 발행 주식이 줄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각 발표 후 삼성전자 주가는 이틀 새 4% 넘게 올랐다. 시가 총액은 코스닥 시장 전체보다 1.5배나 더 커졌다.

▶자사주 소각은 가장 강력한 친(親)주주 정책이다. 하고 싶다고 아무 기업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삼성전자는 90조원 규모 엄청난 현금을 쥐고 있다. 자사주를 대량으로 사들일 능력이 된다. 삼성전자는 과거에도 4차례에 걸쳐 15조원어치 자사주를 소각했다. 반도체가 잘 팔려 주가가 오르고, 자사주 소각으로 또 오른다. 증권사들은 삼성전자의 목표 주가를 주당 300만원으로 높였다. 주주들 입만 벌어졌다.

▶삼성전자 측은 "돌아갈 다리를 끊었다"고 했다. 이재용 부회장이 되지도 않을 지주회사 전환을 완전 포기했다는 뜻이다. 대신 기존 주주들을 우군화(化)해 경영권을 안정화시키는 전략으로 돌아선 듯하다. 이 부회장은 앞으로도 주주 친화 행보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주가를 올리고 배당도 많이 해야 한다. 주주들로선 만세 부를 일이나 이런 의문도 든다. 45조원을 주주들에게 나눠주는 대신 공장을 짓고 투자에 썼다면? 이 부회장으로선 불가피한 선택일지 몰라도 국가경제 전체로 볼 때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