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럼 이제 이 자리에서 비콥(B―Corp)이 될 것을 약속하는 한국 기업이 나올까요?"
지난 20일 서울 한양대 백남학술정보관 국제회의실. 이익을 사회와 나누는 기업을 일컫는 이른바 '비콥(Benefit Corporations)'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국제 콘퍼런스가 열렸다. 사회자가 이렇게 묻자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국내 유명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부들이 한데 모인 자리였다.
이 자리에 강연자로 참석한 미국 유기농 화장품 회사 '닥터브로너스(Dr. Bronner's)의 전략 고문이자 사회공헌 부문 책임자인 크리스 브로너(43)는 마이크를 쥐고 이렇게 말했다. "회사는 혼자 운영할 수 없죠. 결국 우리는 모든 문제를 같이 풀어나갈 파트너, 조력자가 있어야만 경영을 하고 돈을 벌 수 있어요. 그들 모두에게 좋은 일을 한다면, 우리에게도 좋은 결과가 오지 않을까요. 비즈니스를 잘한다는 것도 결국 그런 것 아닐까요?"
대만계 미국인인 크리스 브로너를 23일 아침 서울 삼성동에서 다시 만났다. 채식주의자인 그는 이날 아침 식사로 야채국수를 먹고 녹차를 마셨다고 했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왜 기업이 이익을 사회와 나눠야 합니까?" 브로너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야 저도 좋고, 제 딸도 좋고, 제 딸 친구도 좋으니까요. 모두가 오래오래 다 같이 잘 살 수 있으니까요."
사장 월급이 말단 직원 5배 미만
―닥터브로너스는 그럼 이익의 몇%를 사회와 나눕니까.
"작년에는 전체 매출액의 8.5%, 세금 내기 전 수익으로 치면 40%를 사회에 환원했어요. 지금껏 매년 수익의 3분의 1가량을 각종 사회단체에 기부해왔죠."
닥터브로너스는 1858년 유태인 화학자였던 엠마누엘 하이브로너가 독일 라우파임에 있던 자신의 집을 고쳐 비누 공장으로 만들면서 시작된 회사다. 1929년 미국으로 건너온 하이브로너는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히틀러가 유태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자 이에 저항하는 뜻으로 성을 브로너로 바꾼다. 1942년 그는 부모님이 유태인 수용소로 끌려가 숨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브로너는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이에 대한 답을 비누 포장지에 깨알같이 적어 전국을 돌며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한다. 포장지에는 '우리는 모두가 하나다(All one)' '모든 것은 건설적이고 도덕적인 토대에서 이뤄져야 한다(The Moral ABC)' 같은 구호가 적혀 있었다. 이 문구는 요즘 제품에도 여전히 새겨져 나온다.
2015년에는 미국에서 출발한 글로벌 인증 기관 '비랩(B―lab)'의 심사를 거쳐 '비콥'에 가입했다. 비콥이 되려면 매년 기업이 얼마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그 이익을 사회에 나눴는지를 180여 가지 항목에 걸쳐 2년에 한 번씩 심사를 받아 200점 만점에서 80점을 넘겨야 한다. 닥터브로너스 외에도 아웃도어 의류의 업체 파타고니아, 아이스크림 회사 벤앤제리스 등 50여개 나라 2000여개 기업이 비콥 인증을 받았다. 닥터브로너스는 비콥 인증에서 200점 만점 중 149점을 받았는데, 인증 최소 점수인 80점은 물론 인증 회사 평균치인 97점보다 훨씬 높은 점수였다.
―이익을 나누면 됐지 비콥 인증까지 받을 필요가 있습니까.
"느슨해지지 않으니까요. 매년 지배 구조가 얼마나 투명한가, 직원 복지에 얼마나 신경 썼나, 지역사회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나, 환경을 위해 무엇을 애썼나 등을 엄격하게 심사받거든요. 우리는 그동안 가족 중심으로 회사를 운영해왔고 즐겁게 번 돈을 세상을 위해 쓰려고 노력했지만, 글쎄요…. 그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죠. 내부적인 규칙을 문서화하고 체계화해놓지 않으면 언젠가는 흩어지거나 무너질 수 있거든요. 사람은 유혹에 약하지만 단단한 시스템이 있으면 그 유혹을 이길 수 있겠죠." 닥터브로너스는 현재 엠마누엘 브로너의 5대손인 데이비드 브로너와 동생 마이크 브로너가 공동대표로, 그의 아내 크리스 브로너가 전략 고문으로 함께 운영한다.
―그럼 직원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합니까.
"일단 우리 회사에선 규정상 사장 봉급이 말단 직원의 5배를 넘지 못해요. 직원들끼리의 임금 격차를 최소화하려는 거죠. 제일 적게 받는 직원이라도 법정 최저임금보다는 20~30%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죠. 우리는 이걸 생활 임금(Living wages)이라고 불러요.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기본적인 임금이라는 뜻이죠.
―인건비를 줄일수록 경영이 쉬워지는 것 아닌가요.
"짧게 보면 그렇죠. 직원들을 귀하게 여긴 덕에 치열한 경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지난 10년 동안 다섯 배 성장을 했으니까요. 훌륭한 직원들이 헤드헌터의 몇 마디나 연봉 협상에 따라 왔다갔다하지도 않고요. 그 덕에 회사에서 돈을 많이 들여 직원들에게 가르쳐온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왔죠. 회사가 발전한다는 건 결국 직원들이 같이 늙어간다는 뜻이기도 해요(웃음)."
―함께 일하는 파트너 업체를 대하는 원칙도 따로 있습니까.
"그럼요. 우리가 비누나 화장품, 코코넛 오일을 만들기 위해선 에콰도르·가나·케냐·멕시코·스리랑카·팔레스타인 같은 곳에서 원료를 받아야 하거든요. 이 농부들에게는 정당한 임금을 주고, 또 이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그들이 사는 동네에 학교나 우물과 병원을 지어줘요. 유기농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농작물을 재배해서 넘겨주는 농부에겐 받을 돈의 10%를 더 얹어주죠. 좋은 원료를 공급받지 못하면 운영에 큰 차질이 생기거든요. 이들을 공정하게 대해줄수록 우리에겐 이익인 거죠.
전 직원 일주일 하루는 채식
크리스 브로너와 남편 데이비드 브로너는 모두 '비건(vegan)'이다. 철저한 채식주의자라는 뜻이다. 그의 딸은 태어날 때부터 '락토(lacto)'다. 단백질은 우유와 달걀, 치즈만 먹는 채식주의자라는 뜻이다. 그의 딸은 종종 학교 점심 시간에 친구들에게 "고기 먹고 싶지?"라는 놀림을 당하기도 하지만 태연하게 "전혀"라고 대답한다고 했다. "왜 채식을 하느냐"고 묻자 크리스 브로너는 "생태계를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우리가 유기농 제품을 만드는 것을 고집하는 이유와도 같다"고도 했다.
―혼자 채식을 한다고 생태계가 나아지는 건 아닌데요.
"물론 그렇겠죠(웃음). 그렇지만 나까지 공장에서 사육당한 고기를 먹고 포획된 생선을 먹으면서 지구가 더 빨리 오염되도록 부채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종종 단백질 부족을 걱정하는데 생각보다 콩이나 렌틸, 잡곡에서 많은 단백질을 얻을 수 있어요. 보다시피 건강하죠(웃음)."
―아무리 그래도 채식을 실천하는 것이 쉽진 않을 텐데요.
"그럼요. 여행 다닐 때는 특히 어렵죠. 저도 그래서 아무나 붙들고 '채식을 하라'고 권하긴 힘들어요. 다만 '일주일에 한두 번이라도 고기를 안 먹으면 어때?'라고 물어보죠. 그래서 닥터브로너스에선 매주 월요일마다 전 직원이 채식을 해요. 그날은 회사로 푸드 트럭이 와서 아주 맛있는 채식 요리를 제공하죠."
닥터브로너스에 월요일마다 채식 푸드 트럭이 오도록 제안한 것은 남편 데이비드다. 그는 또 "우리 회사 직원들이 고기를 먹는다면 기왕이면 공장에서 사육된 고기가 아니라 풀을 먹고 건강하게 자란 고기를 먹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고, 회사 직원 식당에 들어오는 모든 고기를 '자연 방목 고기'로 바꿨다. 식당에서 조리하고 남는 고기는 직원들이 싼값에 사가도록 했다. 크리스 브로너는 "동물들과 인간이 같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는 길, 그게 또한 우리가 앞으로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 잘 사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고 했다.
―미국처럼 OECD 국가 중 식재료가 가장 싼 나라에서 유기농 음식만 먹자고 말하고, 환경을 생각하자고 말하는 게 쉽진 않을 텐데요.
그녀가 활짝 웃었다. "맞아요. 그래도 다행인 건 사람들이 조금씩 변하고 있어요. 가령 뉴욕타임스의 한 유명한 음식평론가는 "나는 매일 저녁 6시 이후로는 채식주의자가 될 거야"라고 선언했어요. 채식이 꼭 엄격하고 힘들 필요가 없는 거죠. 저 같은 경우는 음식물 쓰레기를 비료로 만들어서 집 뒷밭에 뿌리고, 그걸로 야채를 길러 먹어요. 사람들이 '날씬한 비결'을 물으면 전 늘 이 얘기를 들려주죠(웃음). 변화라는 게 별것 아녜요. 오늘 저녁 한 끼부터 바꾸면 시작하는 거예요. 작심삼일이면 어때요? 또다시 결심하면 되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