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서울의 4년제 대학을 졸업한 김모(여·25)씨는 이달 초에 있었던 한 대기업의 공채 인·적성 시험 전날 가족들과 한바탕 말다툼을 벌였다. 불안감 때문에 밤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는데 거실에서 TV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김씨는 TV를 보는 가족들에게 "소리 좀 낮춰달라. 남의 일도 아니고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말하다 울컥 눈물이 솟았다고 한다. 김씨는 다음 날 시험을 치른 뒤 집에 돌아와 바로 방문을 닫고 들어가버렸다. 김씨는 "취업해 '사회인'이 되는 게 이렇게 어렵다니. 졸업은 했는데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기분이다. 사소한 것에도 억울하고 화가 난다"고 말했다.

서울 강서구에 사는 회사원 김모(여·28)씨는 "2년째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친언니 때문에 집에 있는 게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다"고 했다. 김씨 언니는 올해부터 집에 독서실 책상을 사두고 공부를 하고 있다. 채용 시즌이 되자 예민해진 언니 때문에 가족들은 TV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늦잠을 잔 언니가 가족들에게 "왜 안 깨웠느냐"고 고함을 지른 것도 여러 번이다. 김씨는 "취업 준비 잘 돼가는지 물었다가 언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불같이 화를 내는 바람에 당황스러웠다"며 "언니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가족들이 가급적 맞춰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취업문이 좁아지면서 심리적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20대 취업준비생들이 늘고 있다. 사춘기를 겪는 10대처럼 가족·친구 등 주변인과 불화를 일으키는 경우도 잦다고 해서 '취춘기(취업사춘기의 줄임말)'라고 불린다. 통계청에 따르면 첫 직장 입사 나이는 2004년 22.5세에서 2016년 23.6세로 해마다 올라가고 있다. 4년제 대졸자 취업률은 3년 연속 하락해 2015년 64.4%로 떨어졌다. 대졸자 10명 중 4명은 취업을 못한다는 것이다.

발달심리 전문가들은 "청년기에서 진정한 의미의 '성인기'로 넘어가는 '취업'이라는 관문을 넘기가 너무 어려워지면서 과거엔 없던 심리적 방황기를 겪는 20대가 늘어난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경향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취업을 못한 청년들이 불안감과 압박감을 속으로만 끙끙 앓다 보니 제2의 사춘기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온라인상에는 '붙을 수도 없는 ○○기업에 원서 내보라는 부모님 말씀이 미치도록 싫습니다' '자존감은 한없이 낮아지고 갑갑한데 언제부터인지 친구도 없고, 부모님께 상담하면 또다시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받을까 두렵네요'처럼 고민을 토로하는 글이 많이 올라오고 있다. '취준생이 되면 이렇게 예민해지는 것인가? 친구와 또 싸웠다' 같은 글도 많다.

취준생 자녀를 둔 가족들의 고충도 크다. 인·적성 시험을 본 김씨의 어머니는 "우리 딸은 사춘기 때는 말도 잘 듣고 착하기만 했는데 취준생인 지금이 사춘기 소녀보다 더 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주부 이모씨는 "60대가 되고도 아이 시험 뒷바라지하게 될 줄 몰랐다"며 "취준생 자녀 있는 집들은 채용 시기가 오면 모두 좌불안석"이라고 했다.

일부 취업 준비생은 주변에 '취춘기'를 선언하고 '인간관계 휴지(休止) 기간'을 갖기도 한다. 취준생 조모(여·29)씨는 최근 취업한 친구들에게 "'취춘기'를 겪는 것 같다"며 "마음에 여유가 없어 누구에게도 친절하게 대하기가 어려운 상태니 취업할 때까지만 이해를 해달라"고 했다. 조씨는 "친구들이 주말 오전에 만나자고 하길래 '나는 인·적성 시험 보러 가야 한다'고 괜히 심통을 부렸다"며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감정 조절이 잘 안 된다"고 했다. 곽금주 교수는 "'청소년기'와 '성인기' 사이에 낀 취준생이 반(反)사회적 성향을 띠는 '우울한 청년층'이 되지 않도록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