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대 교수 A씨는 지난 학기에 이상한 일을 겪었다. 교양과목 강의를 하는데 한 학생이 "아파서 수업에 참석할 수 없다"며 병원 진료확인서를 여러 차례 낸 것이다. 처음엔 "학생이 아픈가 보다"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다른 학생이 제출한 진료확인서를 보고 의심이 들었다. 서로 다른 병원 명의로 돼 있는 두 진료확인서가 양식이 똑같은 데다 의사 이름마저 같았기 때문이다. 병원 측에 문의했더니, 두 학생은 진료받은 기록이 없었다. 진료확인서를 위조해서 제출한 것이다.
경희대 학생 상벌위원회는 지난 학기에 15개 강좌에서 위조 진료확인서를 제출한 학생 18명을 적발해 최대 유기 정학 3개월의 징계 처분을 했다고 20일 밝혔다. 최대 50회가량 위조 진료확인서를 제출한 학생도 발각됐다. 조사 과정에서 학생들은 "선배가 학과 단체 채팅방에 올린 진료확인서 양식 파일을 공유했다"거나 "인터넷에서 받았다"는 등 다양한 입수 경로를 밝혔다고 한다. 김양균 경희대 학생처장은 "다른 학교 친구에게 위조문서를 받았다는 사례도 있을 정도로 문서 위조가 학생 사회 전반에 만연한 문제로 보인다"며 "경종을 울리고자 교육적 차원에서 징계를 내린 것"이라고 했다.
진료확인서 등 문서를 위조해 쓰는 것은 형법상 사문서위조·위조사문서행사 등으로 징역형까지 받을 수 있는 범죄다. 그런데도 학생들이 출결 점수에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고 별 죄의식 없이 가짜 문서를 만들어 쓴 것이다.
문서 위조는 특정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울의 한 사립대 학생 강모(여·24)씨는 늦잠을 자거나, 날씨가 좋아 외출하고 싶을 때는 '가짜 진단서'를 이용한다. 친구가 '수업 빠지는 방법'이라며 단체 채팅방에 공유한 파일을 고쳐서 학교에 제출하는 것이다. 강씨는 "실제 학교 앞 병원 정보가 들어가 있어 이름과 생년월일만 바꿔서 내면 된다"며 "6번 정도 써먹었는데 한 번도 걸린 적이 없다"고 했다. 서울대 대학원생 박모(여·30)씨는 "지난 학기에 너무 쉬고 싶어서 위조 입원 증명서를 내고 3일 정도 수업을 빠졌다"며 "문서를 위조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듣기 싫은 수업을 억지로 듣는 것보다는 낫다"고 했다.
실제 인터넷상에서도 쉽게 위조문서를 구할 수 있다. 학생들이 즐겨 찾는 문서 공유 사이트에서 '진료확인서'를 검색하면, 직인까지 찍힌 위조문서를 1000~2000원에 구할 수 있다. 아예 '학교 제출용'이라고 써놓은 판매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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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외 다른 기관이 발급한 문서도 쉽게 위조 대상으로 사용된다. 서울대 졸업생 B(여·26)씨는 "지난 학기에 졸업반 친구들이 수업에 빠지려고 가지도 않은 기업의 면접 확인서를 내는 걸 보고 놀랐다"며 "대부분 '설마 학교가 기업 인사팀까지 확인하겠냐. 걸릴 일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더라"고 했다. 1999년 1월생으로 아직 법적 미성년자인 연세대 신입생 이모(19)씨는 재수생 동기의 학교 사이트 계정에 자신의 사진을 등록시켜뒀다. 술집에서 써먹기 위해서다. 이씨는 술집에서 신분증 확인을 요청하면 "집에 두고 왔다. 대신 학교 사이트서 내 생년을 확인해주겠다"고 둘러댄다. 그는 "엄밀히 말하면 위조이지만, 대학생인데 술 정도는 마실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 2014년 국내 위조 범죄 사건은 2만1662건 발생했다. 인구가 우리보다 2배 이상 많은 일본(2665건)보다도 위조 사건이 8배가량으로 많은 것이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사회 진출을 앞둔 대학생들이 죄의식 없이 문서 위조를 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위조문서로 수업을 빠지는 것을 '대학 시절의 낭만'으로 여기는 비뚤어진 도덕 불감증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