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집에서 하숙(下宿)을 쳤다. 내 집에 남이 들어와 사는데 무어 좋았으랴. 그래도 날마다 두어 가지씩 색다른 반찬에 입이 호강했다. 누나가 특히 고생한 덕분이었지만. 엄마 눈치 덜 보며 하숙생들 틈에 끼여 텔레비전 보는 재미도 없지 않았다. 이제는 모두 환갑(還甲)이 넘었을 그 형들이 홀딱 빠진 여인이 있었으니. 명문대생이랍시고 시시껄렁하게 침이나 흘리고…. 중학생 마음에 정말 그랬다. 스무 살 혜은이의 청순미(淸純美)를 알기에는 아직 어렸겠지. 그때 대세가 말마따나 ‘청순미’였다면 지금은 ‘관능미(官能美)’가 판친다.

'○○○는 평소 중국어로 인터넷 방송을 진행할 정도로 수준급 중국어 실력을 갖췄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어도 유창하게 구사하는 뇌섹녀다.'

뇌섹녀, '뇌가 섹시한 여자'를 줄인 말이란다. '섹시(sexy)'는 성적(性的) 매력이 있다는 뜻.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뇌섹녀는 그렇다면 두뇌가 관능적인 여자라는 말인데. 섹시라는 말이 하도 흔하다 보니 성적인 느낌이 흐려지기는 했다. 해서 뇌섹녀를 '요염(妖艶)함마저 느낄 만큼 똑똑한 여자'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으냐 할 법한데. 과연 그럴까.

뇌섹녀를 다루는 인터넷 소식에는 어여쁜 얼굴이나, 몸매가 훤히 드러난 사진이 어김없이 딸린다. 제목도 아니나 다를까 선정적(煽情的)이다. '뇌섹녀 ○○○ 섹시한 입술/ 빛나는 꿀피부/ 퍼펙트 바디….' 그러면 그렇지. '좋은 머리가 매력적'인 게 아니라 '좋은 머리 때문에 성적 매력이 더 풍긴다'였구먼. 대중매체의 속셈이 빤히 드러난다. 아니할 말로, 외모가 빠지는 사람을 이렇게 표현하는 걸 본 적 있는가.

사실 우리 사회의 천박(淺薄)함은 '꿀벅지'에서 이미 알몸을 드러냈다. 50대(代) 아내도, 20대 딸도 민망하고 불쾌하다는 이 말. 민감한 성차별적 언어이니 방송에서 쓰지 말라고 여성가족부가 권고한 게 열흘 전이다. 이른바 '하의(下衣) 실종' 사태를 몰고온 지 10년이 다 돼가는데….

무슨 도덕군자(道德君子)도 아니지만, 우리네 처자(妻子)들한테 한사코 성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일이 넌더리 난다. 남자는 대상에서 쏙 빼놓고 이런 얘기 함부로 하면 성차별로 큰코다친다고? 아이고 머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