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4월 29일 밤 9시 40분쯤. 밤벚꽃놀이를 즐기는 시민들로 가득 찼던 창경원(오늘의 창경궁)에서 큰 소동이 벌어졌다. 궁 안의 연못 춘당지에서 두 청년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치고받으며 수중 격투를 벌이자, 구경꾼 1000여 명이 몰려들어 연못을 에워싼 것이다. 두 청년은 춘당지에서 보트놀이를 하다 보트가 서로 부딪치면서 시비가 붙었다. 애인까지 지켜보는데 밀릴 수 없었는지 치열하게 싸웠다. 한밤의 격투가 10여 분간 이어지는 동안 경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경향신문 1970년 4월 30일 자). 1960~70년대 봄마다 벌어졌던 창경원 밤벚꽃놀이 현장이 어느 정도까지 난장판이 됐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1924년부터 시작된 이 고궁의 꽃놀이는 1984년 일제 잔재 청산 차원에서 창경궁이 복원되면서 중단될 때까지 60년간 한국인들에게 최대의 봄 축제마당이었다. 한 달 남짓 동안 입장객이 150만명 안팎이나 됐다. 2000여 그루의 벚나무, 3500개의 오색등 불빛을 보며 남녀노소가 먹고 마시고 떠들었다. 대학생들은 이때다 싶어 한밤 고궁에서 미팅을 했다. 은어로 '나체팅(나이트 체리 블로솜 미팅)'이었다.
벚꽃놀이는 즐거움 가득한 이벤트만은 아니었다. 벚꽃이 일본의 꽃 아니냐는 논란은 당시에도 자주 튀어나왔다. 하지만 왕벚나무의 원산지가 제주도라는 사실이 1960년대 초부터 알려진 뒤엔 논란은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다. 진짜 문제는 현장의 무질서였다. 특별한 놀이 공간이 없던 때라 전국에서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들었다. 1971년 4월의 경우, 주말 하루에 25만명이나 입장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오늘의 목포시 전체 인구(23만7000명)보다 많은 인원이 고궁 하나를 가득 메운 것이다. 3.3㎡당 10명의 사람이 들어찬 셈이었다. 이쯤 되면 축제라기보다는 아수라장이었다. 1972년엔 벚꽃놀이 기간 중 창경원에서 집 잃은 미아가 918명이나 발생했으며, 쓰레기가 트럭 500대 분량 나왔다.
난장판 축제엔 별의별 무법자가 다 있었다. 1966년엔 우리 안의 악어를 벽돌로 때려 중상을 입힌 사람도 있었다. 벚꽃놀이 때의 대표적 꼴불견은 세 가지가 꼽혔다. 첫째는 꽹과리, 장구, 기타까지 치면서 소음을 내는 고성방가다. 둘째는 과도한 애정 표현이다. 커플들이 으슥한 숲속을 찾아 온갖 추태를 부리자 신문은 "창경원이 도색경(桃色境)이 됐다"고 혀를 찼다. 셋째 꼴불견은 벚나무를 타고 올라가 가지를 꺾어 가는 것이다. 창경원 측은 이를 막으려고 벚나무 밑동에 가시철망을 감아놓기도 했다.
고궁 담장 안에서 북적이던 서울의 벚꽃놀이 인파는 오늘날엔 여의도 등지의 널따란 벚꽃길로 옮아갔다. 그런데 일부 행락객의 추태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난 9일 국립서울현충원의 벚꽃축제 현장에선 술 마시고 웃고 기타 치고 노래하거나, 낯 뜨거운 애정 행각까지 벌인 사람들이 있었다. 또 여의도 벚꽃축제장 관람객들의 추태로는 애정 표현, 나무 꺾기, 쓰레기 투기, 고성방가 등이 꼽혔다는데 어쩌면 반세기 전 꼴불견들과 그토록 빼닮았을까. 한 술 더 떠 이젠 벚꽃잎이 날리는 사진을 찍으려고 나무 밑동에 발길질하는 사람까지 있다고 한다. 국민소득 1000달러를 목표로 살던 때의 무질서가 3만달러 소득을 향해 가는 오늘에도 지속된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