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녀 늘어나는 태국, 저축 문화가 없어 비싼 화장품도 덥썩 사들여
동남아에서 한국 제품 이미지 긍정적…제품에 태극기가 붙어 있는 것만으로 신뢰감 줘
K뷰티가 전세계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선 궁극적으로 '한류'와 'K' 떼고 일어서야
방콕 최대 규모 상권인 시암에 위치한 파라곤 백화점. 이 곳에 설화수와 라네즈, 마몽드 등 매장은 매년 고속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제품에 따라서 현지인의 한 달 월급에 맞먹는 수준이지만 없어서 못 살 정도로 한국 화장품은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김월정 아모레퍼시픽 태국법인 부장은 “과거 에이전트를 통해 제품을 공급하다 2012년부터 직영체제로 전환한 뒤 브랜드 선호도가 훨씬 높아졌다”면서 “이제는 태국 소비자들 사이에 ‘K뷰티 하면 라네즈’라는 인식이 있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이 매장도 월매출액이 1억원에 달한다.
◆ 늘어나는 태국의 독신 여성… 저축하고 아끼기 보단 현재를 즐기려는 성향 강해
동남아시아의 소득 수준이 낮아, 화장품 등 사치재에 대한 수요가 낮을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와 다르게 현지에서 유통업에 종사하는 관계자들은 동남아시아인의 소득 수준 대비 소비력은 상당히 높은 편 이라고 판단했다.
태국 화장품 유통업체 새얀을 운영하는 박지훈 대표는 “물론 마스크팩 600원, 쿠션 1만1000원 수준의 저가 화장품 시장이 확실히 자리잡고 있지만, 한국인이 예상하는 것과 다르게 고가 브랜드의 수요도 높은 편이다. 예컨대, 태국인의 평균 월급은 대졸자 기준으로 60만원 수준인데, 저축하고 돈을 모으려는 문화가 없기 때문에 화장품 구입에 큰 고민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력 있는 제품의 경우 가격이 비싸더라도 불티나게 판매된다”고 말했다.
새얀은 태국에서 국내 화장품을 유통하는 업체로, 태국 오프라인 매장 700곳에 한국 화장품을 공급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전년도 대비 8배 성장했다.
새얀의 박지훈 대표는 태국 화장품 수출 사업을 시작하게된 이유에 대해 태국 화장품의 가격이 한국과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태국이 물가가 낮기 때문에, 한국 화장품이 태국에서 제값을 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과일과 해산물 등 식자재의 가격은 한국과 비교해 상당히 저렴하죠. 하지만 화장품 같은 공산품은 다릅니다. 방콕의 백화점, 헬스뷰티스토어를 둘러보면 태국에서도 저렴한 화장품으로 꼽히는 제품들이 한국의 온라인 최저가와 비슷한 수준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태국에서 결혼하지 않고 싱글 라이프를 즐기는 독신 여성이 늘어나는 점도 한몫했다. 많은 태국 여성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꾸미고 가꾸는데 월급의 대부분을 쏟는 것이다. 실제로 태국의 인구 증가율은 연 0.4% 미만으로, 1970년대 2.7%를 기록했던 증가율과 대조적이다. 태국 보건국장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태국 여성들이 고등교육을 받고, 독신의 삶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면서 결혼 및 출산에 대한 수요가 줄고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태국에는 이미 로레알그룹, 에스티로더그룹, LVMH그룹, 시세이도 등이 수입 화장품이 매출 상위권에 자리하고 있다. 대한화장품산업연구원의 손성민 연구원은 “아세안 국가 중 화장품 시장의 규모와 구매력 면에서 태국이 가장 월등한 것은 사실이나, 그만큼 유럽, 미국의 유수 브랜드의 화장품 시장 점유율이 높기 때문에, 한국 브랜드 업체가 단순히 가격만 낮춰서는 태국 시장에서 선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 한국 태극기 로고가 그려져 있는 것 자체가 신뢰의 상징
전문가들은 한국 화장품의 강점이 우수한 제품력과 참신한 용기 디자인에 있다고 조언한다.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귀여운 캐릭터에 반응하는데, 한국이 바나나모양의 용기라든지 기존에 없던 패키징을 디자인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 한국 화장품 업계가 잘못 인식하는 부분도 있다. 동남아 여성들이 무조건 밝은 색상의 파운데이션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전에는 21호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면, 이제는 23호로 넘어가는 추세입니다. 무조건 하얗게 보이는 것보다 본인에게 맞는 컬러를 찾고 있다는 증거죠." 새얀의 박지훈 대표의 조언이다.
아울러, 한국 제품이라는 것 자체가 동남아시아 고객에게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제품에 태극기 로고가 그려져 있다는 자체로 태국 소비자들이 그 제품을 신뢰할 정도로 태국에서 한국 제품은 뛰어나고, 안전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화장품 기업의 해외 진출 시 모조품, 즉 짝퉁이 생기는 것에 유의 해야 한다. 애써 자사 브랜드를 홍보하고, 마케팅 비용을 쏟아부었는데, 보다 저렴한 유사 제품이 바로 다음날 등장해 버젓이 팔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코트라 이주현 담당은 “많은 노력 끝에 동남아시아에 진출하게 되더라도 보따리상을 통해 유통되거나 유사 제품이 등장할 수 있다”며 “사전에 코트라를 통해 상표 디자인을 등록하거나, 제품에 정품 인증 마크를 붙이는 등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 K뷰티의 K 떼고도 성공할 수 있어야…한류에 편승한 제품 판매는 지속가능하지 않아
전문가들은 한국 화장품 업체가 해외에서 지속적으로 매출을 올리기 위해서는, 한류 혹은 K뷰티라는 카테고리에 갇혀서는 안된다고 조언했다. 마케팅 전략으로 한류 스타를 기용하는 것은 지금 당장은 유리하지만,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 미국 화장품 유통업체인 피치앤릴리의 알리샤 윤 대표는 “궁극적으로 K뷰티 제품이 전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기 위해선, K뷰티의 K를 떼고 기술력과 브랜드만으로 승부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태국에서도 한류 콘텐츠에 대한 인기는 시들고 있는 추세다. 박지훈 대표는 “여전히 소녀시대의 윤아, 수지, 송지효, 박보검 등 한국의 연예인이 태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지만, 한류 열풍 자체는 5년 전과 비교해 많이 가라 앉은 편이다. 반대로 관세 철폐와 온라인 유통의 부상 등으로 한국 제품을 접해본 소비자들은 기술력에 반해서 꾸준히 문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화장품산업연구원 손성민 연구원은 “이번 중국의 사드 몽니로 미루어 봤을때, 국가의 이미지를 앞세운 전략은 나라와의 외교적 갈등에 따른 리스크가 큰 것으로 드러났다”며 “한국의 제품임을 앞세우기 보다는 자체 기술력과 브랜드의 힘이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