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임신한 주부 A씨는 아이 이름을 지으려고 인터넷을 찾아보다 한 사이트에서 “‘다원’은 ‘모두가 다 원하는 사람이나 사물’이란 뜻의 순 우리말”이라고 적힌 글을 봤다. 포털사이트에 검색해보니 같은 내용의 글이 많이 떴고, ‘온라인 국어사전’에도 그런 뜻으로 등재돼 있었다.

뜻이 마음에 들어 그렇게 이름을 짓기로 어느 정도 마음을 굳혔지만, 순 우리말 단어에 ‘원하다’라는 뜻의 한자 ‘원(願)’자가 들어가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A씨가 국립국어원 온라인 상담 코너에 문의한 결과, 뜻밖에도 ‘다원’은 허구(虛構)의 단어라는 답이 돌아왔다.

엉터리 순 우리말이 곳곳에 퍼져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가능하면 아름다운 토속어를 사용해 태명(胎名) 등 아이 이름이나 상호, 단체명을 지으려는 사람들이 ‘가짜 순 우리말’에 속아 넘어가 뒤늦게 난감해지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국가기관도 소속 기물(器物)의 공식 이름으로 엉터리 우리말을 사용해 일반 국민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근거 없는 순 우리말은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를 중심으로 횡행한다. 초성 ‘ㄱ’부터 ‘ㅎ’까지 100개 넘게 순 우리말을 나열해 놓은 정체불명의 목록도 떠돌고 있다. 내용 중 어원학상 근거를 찾아보기 어렵거나 부정확한 것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예를 들어 ‘무아: 무지개 핀 아침’, ‘초아: 초처럼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것’, ‘예그리나: 사랑하는 우리 사이’, ‘아사: 아침의 옛말’이라는 식이지만, 이는 모두 누군가 그럴듯하게 말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국립국어원의 설명이다.

단체명이나 상호에 많이 쓰이는 ‘가온’이란 단어도 다소 문제가 있다. 흔히 ‘중심’이나 ‘가운데’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절반’이라는 뜻이다. 국립국어원의 한 어문연구관은“‘가운데’의 옛말은 정확히 말해 ‘가온대’”라며 “세간에는 ‘가온’과 ‘누리(세상의 옛말)’를 합친 ‘가온누리’라는 단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뜻으로 알려졌지만, 굳이 단어를 합성하자면 ‘누리 가온대’라고 해야 비슷할 뜻일 것”이라고 말했다.

2인조 밴드 '해류뭄해리' 소개 페이지.

이밖에 ‘새라(새로운 것)’이나 ‘단미(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여자)’ 역시 근거가 없는 허구의 단어이다. 그나마 이런 단어는 느낌이라도 비슷하지지만 조어(造語) 과정을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기상천외한 엉터리 단어들도 있다. 예컨대 ‘해류뭄해리(가뭄 뒤의 단비)’, ‘어라연히프제(치마 입고 활 쏘는 여자)’, ‘듀릿체리(늦게 얻은 딸)’ 등이다. 일부에선 “느낌이 신선하다”며 적극적으로 쓰기도 한다. 작년 11월 데뷔한 2인조 어쿠스틱 밴드 ‘해류뭄해리’는 인터넷 기사와 글을 참고해 밴드명을 지었는데, 결과적으로 어원(語源) 없는 이름을 갖게 됐다. 해류뭄해리의 한 멤버는 “사전적 의미보다는 우리가 의도한 의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밴드명을 바꿀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공공기관이 엉터리 순 우리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해양수산부 산하 공공기관인 극지연구소는 지난 2009년 국내 최초 쇄빙선 ‘아라온’호(號)를 진수했다. 당시 극지연구소는 이 이름에 대해 “바다를 뜻하는 순 우리말 ‘아라’와 전부를 뜻하는 ‘온’이 합쳐져 만들어진 말로, ‘전 세계 모든 바다를 누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아라’가 바다의 순 우리말이라는 근거는 없다. ‘바다’ 자체가 이미 순 우리말이다. 이와 관련한 논란이 일자 극지연구소 측은 착오를 인정하면서도 “이미 널리 알려져 버렸다”며 배 이름은 바꾸지 않았다.

작년 말 취항한 관세청 울산세관의 감시정 '아라마루'호의 모습.

작년 12월 취항한 관세청 산하 울산세관의 밀수감시선에도 ‘아라마루’호라는 이름이 붙었다. 당시 울산세관은 “바다를 뜻하는 ‘아라’와 하늘을 뜻하는 ‘마루’를 붙여 바다와 하늘을 통해 펼쳐나가는 무역대국의 이상을 표현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나 ‘아라’는 물론이고 ‘마루’에 관한 설명도 근거가 희박하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마루’의 뜻을 ‘하늘’이 아닌 ‘등성이를 이루는 지붕이나 산’으로 풀고 있다. 울산세관 관계자는 이에 대해 “직원 공모를 통해 붙여진 이름인데, 국립국어원 측에 정식 문의한 뒤 문제가 있으면 명칭 변경 등의 조치를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순 우리말을 쓰려는 노력 자체는 권장할 만하지만, 공식적인 이름이나 명칭을 정할 땐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와 연결된 온라인 표준국어대사전이나 토박이말 사전 등에 표제어를 한 번쯤 검색해 보고, 나오지 않으면 그 정확성을 의심해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