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수체’로 유명한 한국의 대표적인 시각 디자이너. 디자이너의 디자이너라고 불리는 안상수 작가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라는 타이틀이 붙은 전시를 연다. 시간대별로 정리된 그의 작품들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디자이너로서의 그뿐만이 아닌 인간 안상수의 삶의 궤적까지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햇살이 쏟아지는 봄날 오후의 미술관은 평화로웠다.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 사이로 안상수가 특유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위아래가 붙은 슈트. 빨간색 니트 모자. 이 복장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어깨에 사선으로 걸친 아날로그 카메라 역시 그가 늘 가지고 다니는 소품이다. 그는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둔다.

'ㅇㅅㅅ'과 'ㄴㄱㅍㅌ'.
미술관 한쪽 벽을 장식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자음의 조합은 '안상수'와 '날개파티'라는 뜻이다. 안상수의 호가 '날개'이고, 그가 설립한 교육기관인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의 줄임말이 '파티'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한국의 작가를 세대별로 집중 조명하는 격년제 프로젝트 SeMA(세마) 삼색전을 열고 있는데, 올해 주인공으로 안상수 디자이너를 선정했다. 디자이너로서의 40년 경력과 지난 몇 년간 파티의 결과물을 한데 모으니 1층 상설 전시관이 꽉꽉 차고도 모자란다.

크게 ‘날개’와 ‘파티’로 나뉘는 전시는 글꼴 디자인, 타이포그라피, 설치작업 등 다양한 형태로 한글 작업을 해온 그의 작품들이 시간 순으로 진열되어 있다. 1985년 안상수체가 나왔을 때부터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교수 시절까지 이어진 각종 작업들은 ‘날개’ 파트에 소개되고, ‘파티’ 파트에서는 2013년 교수직을 박차고 나와 그가 만든,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처음 보는 형태의 타이포그라피학교의 교수들과 학생들의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파티 파트의 전시장 한쪽 구석에는 교실이 있다. 파티의 커리큘럼에서 선별한 워크숍과 관객 참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곳이다. 잠재적인 디자인 공동체와의 만남을 제공하고 작가와 직접 심도 있는 대화의 시간도 가질 수 있다. 직접 소통하는 것은 교육기관 파티의 교육방침이기도 하다.

전시 준비는 언제부터 하셨나요.
작년 2월인가 제안을 받았어요. 결정된 것은 여름쯤이었던 것 같아요. 이후로 차근차근 준비를 했어요. 전시는 권진 큐레이터의 작품이에요. 그분이 지휘를 하고, 저는 말하자면 배우와 같은 역할만 했을 뿐이에요.

디자이너 안상수의 작업이 '날개'와 '파티'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습니다. 소감이 어떠십니까.
이 부분(파티 섹션)은 특히 감회가 남달라요. 다른 건 제가 직접 하는 거지만, 이 부분은 제가 농담 삼아 이야기하는 '보너스 인생'이거든요.(웃음) 거기에 관련된 것이라서 새롭고 좋아요. 저로서는 힘을 다해서 한 거니까, 시쳇말로 '몰빵'을 한 거니까요.(웃음)

'보너스'라는 표현을 쓰셨지만, 날개와 비교했을 때 파티가 전혀 밀리지 않는데요?
60년 경험이 녹아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굉장히 방대한 것들이 한데 있습니다.
학교 풍경을 그대로 살렸어요. 여기 자개장이 학교에 있는 거예요. 우리는 어머니를 거부하는 교육을 받아왔어요. 그게 학교 교육의 일관된 핵심이었지요. 어머니를 거역하는 문화, 어머니가 하는 건 다 촌스럽고 할머니는 더 촌스럽다는 생각.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아주 극소수죠. 그런데 그걸 거역할 수는 없잖아요.

거역하겠다고 생각해서 거역을 할 순 없어요. 그걸 받아들여야 해요. 거기서부터 교육이 시작되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존재가 시작되는 거잖아요. 그걸 일깨워주는 게 이 시대 교육의 출발점이고. 딛고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또 헛바퀴 도는 거예요. 한참 갔다가 돌아와야 해요.

이곳의 물건들은 전혀 촌스럽지 않습니다만.
저 찬장이 다 버려진 것들이에요. 요즘 시중에 나오는 가구들은 멋있긴 하지만 물만 들어가면 불어터지는 질이 안 좋은 것들이 많아요. 재료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게 훨씬 좋아요. 일단 아름답잖아요. 저게 다 우리가 거부한 거예요. 우리 할머니, 어머니의 감각을 다 거부한 거죠. 그런데 치마저고리에 때가 탄 모습도 아름답잖아요?

경험에서 터득한 논리인가요?
저에 대한 반성의 의미도 있어요. 나는 안 그랬다가 아니라, 나를 그렇게 봐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요. 나이가 다 들어서, 이제야 나에 대한 자각이 든 거예요. 일찍 그랬어야 되는데.(웃음) 사실은 교육부터 그랬다면 좀 달라졌을 수도 있어요. 교육이 그랬다면 아마 달라졌을 거예요. 교육이 그렇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도 교육현장에서 배우미들에게 가르칠 때 못 느꼈거든요.

# 한글 디자인에 날개를 달았다

알려진 대로 그는 잘나가는 시각 디자이너였고 잘나가는 대학교수였다. 1985년 안상수체가 나오면서 그는 신화가 됐다. 한글을 네모 틀의 질서 속에서 해방시키고, 오랫동안 한자의 틀에 갇혀 있던 한글을 현대적으로 탈바꿈했다.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후에도 꾸준하게 활자 작업, 프로젝트 등을 수행하던 그였다. 디자이너로서 안정적이고 충만한 삶을 살았다.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이 공간을 채우고 있네요.
세종이라는 분은 엄청나요. 가까이하면 할수록 이분의 존재 자체가 엄청난 분이구나 느낍니다. 지금 우리의 존재를 있게 한 사람이에요. 문화의 존재. 언어라는 것이 겨레예요. 민족 언어학이 그렇다더라고요. 나라를 만든 선각자들이 그렇게 믿었어요. 훔볼트가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글자가 없으면 겨레도 없어요. 말만 있고 글자가 없었던 겨레들은 다 없어졌어요. 찬란한 인디언 문화도 그렇고요.

세종대왕이 한글을 디자인했다는 말씀을 하셨죠.
글자를 만든다, 디자인한다, 이것은 굉장히 불가사의한 일이에요. 역사상 그런 일이 없었어요. 의도적으로 용의주도하게 디자인한 예는 한글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위상은 엄청난 거예요.

안상수체도 글자를 디자인했다는 의미에서는 같은 궤에 있는 작업이잖아요.
저는 있는 걸 가지고 뭘 한 거예요. 세종은 너무나 엄청나니까 (저랑) 비교하면 안 돼요. 세종과 비교한다면 발뒤꿈치도 못 따라가는 거예요. 비교 자체가 너무 엄청나죠(웃음).

안상수 작업의 궤적에 관통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글자죠. 글자에 관련된 것, 타이포그라피는 글자가 핵심이에요. 글자는 한글이니까, '글자', '한글', '타이포그라피' 이런 것이 가운데 관류하는 키워드예요. 디자인의 척추, 등뼈가 글자예요. 우리에게 글자의 뿌리는 한글이고요.

글자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문화라는 것은 글자로 지은 집이라고 봐요. 문화의 핵심이기도 하고요. 그 근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가장 늦게 글자가 태어났어요. 600년 전이라는 것은 굉장히 짧은 기간이에요. 그런데 그때 글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를 일부러 띄우자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자존감이 있어요. 그런데 그만큼 못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 보너스 인생 만들어준 ‘파티’

좋은 대학에서 안정된 교수생활을 할 때, 사람들은 모두 이루었다며 환호했지만 스스로 갈증을 느꼈다. 사회의 근간이 되는 교육을 디자인하고 싶었다. 지금까지의 삶이 본인을 위한 축적의 시간이었다면, 뭔가 풀어내는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독일의 바우하우스처럼 예술과 디자인에 영향을 미치는 전문학교를 세워서 한국의 디자인 공동체와 교육협동조합을 만들겠다는 꿈을 가졌다. 나이 예순에 그는 모든 것을 걸고 타이포그라피학교 사업을 시작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해보지 않고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파티의 모습은 처음 설립할 때 상상했던 모습과 부합하는 것 같나요?
잘 온 것 같기는 한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이건 계속 비틀거리면서 가는 거예요. 정해진 대로, 계획이 완벽해서 가는 게 아니라, 계속 가는, 물결을 찾아서 가는 그런 형식이에요.

파티는 교육을 디자인하는 작업으로 보입니다.
제 작업들 가운데를 관류하는 키워드가 글자예요. 디자인의 척추 역시 한글이고요. 글자는 문화의 핵심이에요. 제 작업이 글자로 이어져 왔다는 것은, 근본이라는 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왔다는 뜻이에요. 그게 사실은, 교육이라는 것도 사회의 근간이잖아요. 이런 것들을 합쳐버리면 교육을 디자인하는 거예요.

즐거워 보이십니다.
지금서부터 하는 일은 보너스예요. 제가 여태까지 저를 위해서 축적했다면 지금부터는 그걸 풀어내는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런 맥락에 있으니까 모든 게 즐거워요. 어려운 만큼 즐거워요. 그런 제 작업이나 사고의 맥락이, 저 스스로 설득이 되니까요.

일상은 어떻게 됩니까.
매일 파주에 가요. 차 안 막히는 아침 일찍 가서 차 안 막힐 때 와야 하니까 늦게 와요. 자유로를 달리면서 자유를 생각하는 기분이 아주 좋죠.(웃음)

전시장을 쭉 돌아보니 안상수의 전성기가 여러 번이네요. 언제가 가장 좋으셨어요?
전성기, 그런 건 관심 없어요. 그냥 지금이 중요한 것 같아요. 대화하고 있는 지금. 전성기는 글쎄, 삶을 마감할 때 그냥 마무리하는 순간, 그 정도가 아닐까요?

그럼 앞으로의 목표나 꿈이 있다면요?
목표라기보다는 꿈이 있어요. 제가 갖고 있는 걸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태워버리고 가는 거요. 젖은 통나무는 태우면 잔재가 남는데, 마른 장작은 태우면 재도 하얗게 되잖아요. 제가 받은 것은 다 쏟아버리고 가고 싶어요. 그게 솔직한 꿈이에요.

'태운다'는 너무 많은 뜻을 품은, 크고 심오한 단어입니다.
제가 받은 것 모두 다요. 디자이너로서 살았잖아요. 디자이너로서 받았던 것은 다 태워내고 가야 편할 것 같아요. 그런 상태를 늘 꿈꿔요.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 방법이 여러 개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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