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남궁민(39)은 검은색 머리에 회색 모직 정장, 갈색 뿔테 안경으로 말끔히 단장하고 서울 논현동 한 카페에 들어섰다. '이 사람이 김 과장 맞나' 싶었다. 2주 전까지 그는 KBS 수목 드라마 '김과장'에서 날라리 직장인 김성룡 과장 역을 맡아 노랗게 염색한 머리에 튀는 옷차림을 선보였다.

남궁민은“노란 머리 김 과장 캐릭터를 빨리 잊고 다른 인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까맣게 머리 염색부터 했다”고 말했다.

대기업 사무실 배경 코믹 드라마에서 남궁민은 '직장인의 영웅'이 됐다. 부하 직원을 괴롭히는 상사에게 큰소리치고, 회계장부 조작 비리도 바로잡았다. 사회 정의 구현에 관심 없는 괴짜인데도 여러 상황이 겹치면서 본의 아니게 '의인'이 되어가는 과정이 유쾌하게 펼쳐졌다. '김과장'은 경쟁작이던 SBS 대작 '사임당'을 4회부터 제치고 시청률 1위를 끝까지 지켰다. TV 광고 섭외가 밀려들어 남궁민은 드라마 끝나고도 쉬지 못했다고 한다.

극중 높은 톤 목소리로 시종일관 능청을 떨며 까불대던 남궁민은 실제로는 저음으로 느릿느릿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원래 그렇게 웃기냐고 저에게 물어보는데 사실 저는 진지하고 재미없어서 예능 프로그램도 못 나가는 사람이에요." 데뷔 이래 맡았던 모든 역할 중 실제 자신과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고 한다. "많이 연구하고 사소한 것 하나까지 계산했죠. 눈썹과 얼굴 근육, 손을 많이 움직이고 성대에 힘을 주면서 딱딱거리는 말투를 만들었어요. 조금만 방심해도 원래 제 습성이 나오기 때문에 계속 집중할 수밖에 없었어요." 결과는 대성공. "같이 연기하는 배우들이 저를 보고 하도 웃어서 나중엔 '내가 그렇게 웃기는 놈인가' 싶더라고요."

'김과장'에서 첫 단독 주연으로 나선 남궁민은 이전까진 주인공을 질투하거나 괴롭히는 연적, 악역을 주로 맡았다. 2011년 '내 마음이 들리니'에서 주연급 조연으로 상처와 열등감을 섬세하게 표현해 크게 주목받았다. "그때 연기 칭찬 받고 인기도 얻었으니 이제부턴 주연만 하겠다고 마음먹고 주연 아닌 역할이 들어오면 모두 거절했다"며 "그러다 결국 2년이나 쉬게 됐다"고 했다.

"의도치 않게 공백기를 겪으면서 깨달았어요. 자연스럽게 흘러오는 기회를 내가 억지로 만들어보려 했구나. 그 뒤론 작품 선택 기준이 바뀌었죠. 내 역할이 얼마나 멋있는지만 신경 쓰다가 작품 자체를 보게 됐어요." 대본과 연출이 좋다면 작은 역도 받아들였다. 쉴 틈 없이 작품을 이어나가면서 "연기가 즐거워지기 시작했고 스트레스가 사라졌다"고 했다.

지난해 극악무도한 재벌 2세로 나온 '리멤버', 따뜻한 동네 변호사 역 '미녀 공심이'에 이어 '김과장'까지 성공을 이뤘다. "여전히 연기는 정말 어렵고 제가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 걸 '김과장'을 통해 알게 됐어요. 초심으로 돌아가는 계기가 됐어요." 새로운 목표도 생겼다. "나이가 들면 아무리 좋은 연기라도 매번 똑같은 연기를 하게 되기 쉽죠. 다른 사람 조언에 귀 기울이는 부지런한 배우가 되고 싶어요." 올해가 가기 전 '김과장'을 능가하는 연기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그의 말에 자신감이 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