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예테보리에 있는 퓨전 한식당 주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대학생 임채홍(24)씨는 현지 요리사들이 매달 김치를 80~90포기씩 담그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한국 배추와 형태나 맛이 유사한 스페인산 배추를 소금으로 절여 고춧가루와 양파, 마늘 등을 넣고 버무린 한국 김치였다. 멸치 액젓이 없어 한국의 까나리액젓과 유사한 피시 소스(fish sauce)를 넣고, 배추를 잘게 잘라 겉절이 형식으로 무치는 것이 차이였다. 스웨덴인들이 부르는 이름도 '김치(Kimchi)'였다. 김치는 이 식당에서 반찬으로 제공되지만 따로 사려고 할 때는 500g에 56크로나(약 7000원)씩을 받고 판다. 김치가 남아서 버린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임씨는 "양념치킨과 쌀밥을 쌈 채소에 싸 먹는 '쌈(Ssam)'도 잘 나간다"고 했다. 채식주의자들이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빼달라고 하면 두부로 대체한 메뉴를 제공하기도 한다.
요즘 스웨덴·덴마크 같은 북유럽에서 한식이 새로운 '트렌디 푸드'로 떠오르고 있다.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은 최고급 식당에 비빔밥·불고기가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호떡이나 떡볶이 같은 우리나라 길거리 음식도 현지 사람들 사이에서 별미로 소문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북유럽의 20~30대 젊은이들은 페이스북·인스타그램 같은 SNS를 통해 자신들이 직접 한식으로 차린 테이블 사진을 찍어 올리거나, 호떡을 베어 물고 즐거워하는 식의 '인증샷'을 공유하면서 한식을 문화 코드처럼 즐기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작년 11월 스웨덴에 이민 간 백수정(26)씨도 최근 달라진 한식의 인기를 현지에서 체감했다. 백씨는 "요즘 스웨덴 현지 대형마트인 이카(IKA)나 쿱(Coop) 같은 곳에서 '건강한 맛'이라면서 김치를 홍보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면서 "몇몇 현지인들은 직접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서 김치를 담그기도 하더라"고 했다. 라면이나 고추장, 불고기 소스 같은 한국 식재료를 찾는 일도 과거보다 수월해졌다고 한다. 현지에서 '쉽게 맛보기 힘든 음식'으로 분류돼 일식보다 값비싼 한식에 대한 문턱이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한식은 아시아 음식 중에서도 북유럽에 뒤늦게 알려진 '후발주자'다. 교민이 상대적으로 많은 태국·중국·일본 음식이 한식보다 먼저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거주·유학을 목적으로 북유럽 국가로 이주하는 한국인이 늘어나면서 최근 그 양상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외교부의 재외동포현황에 따르면 노르웨이 재외동포 수는 2011년 605명에서 2015년 1121명으로, 덴마크는 2011년 293명에서 2015년 551명으로 2배 가까이 늘었다. 핀란드와 스웨덴도 각각 같은 기간 재외동포가 228명, 739명이 늘었다. 현지에서 한식을 알리는 행사도 해마다 이뤄지고 있다. 덴마크한국입양인협회는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에서 매년 '김치 페스티벌'을 열어 한국 음식을 홍보한다. 경주대도 올해 9월쯤 스웨덴에서 한식 페스티벌을 개최할 예정이다. 이처럼 북유럽에 거주하는 한인이 늘고 한식 홍보 창구가 늘면서 현지인들이 자연스럽게 한식을 접할 기회가 많아진 것이다. 현지 이주민들에 따르면, 스웨덴 스톡홀름에만 한식당이 10여 군데, 덴마크에는 3~4군데가 성업 중이다.
북유럽에서 '한식=건강한 음식'이라는 평가가 최근 들어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도 인기 요인으로 꼽힌다. 김희욱(32)씨는 지난 4년 동안 덴마크에서 자전거 노점을 끌고 다니며 김치나 불고기 소를 넣은 우리나라 호떡을 판매해 큰 인기를 끌었다. 김씨는 "현지인들이 내가 직접 호떡 속에 넣는 불고기나 김치를 만드는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곤 했는데, 이를 보면서 '한식은 만드는데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지만 그만큼 몸에 좋고 맛도 좋은 슬로 푸드'라는 인식을 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는 "세계 최고 레스토랑으로 꼽히는 덴마크 '노마'의 셰프들도 김치를 만들어 저장고에 담아 둔다"며 "발효 음식이 발달된 한식에 대해 현지인들의 관심이 높다"고 했다.
일부에선 북유럽 사람들이 매운 음식의 매력에 새롭게 눈뜬 것도 한식에 호기심을 보이는 또 다른 이유일 것이라고 분석한다. 북유럽 커뮤니티 '노르딕후스'를 6년째 운영하고 있는 이종한(50)씨는 "외국인들이 매운 한식을 싫어할 것이라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의외로 북유럽 사람들이 고추장 양념 불고기나 고추장을 넣은 비빔밥을 좋아한다"면서 "이곳 사람들은 한국의 매운맛을 두고 '골고루 맵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입을 톡 쏘고 사라지는 괴로운 매운맛이 아닌 자꾸 당기는 매운맛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고 했다. 북유럽에선 본래 양념 자체가 발달하지 않아 매운 음식을 찾기 어렵다. 후추를 넣은 청어 절임이나 생선포 정도가 매운 음식으로 꼽히는 정도다. 따라서 이런 북유럽 사람들에게 인도나 중국 음식의 향신료 맛보다는 감칠맛이 느껴지는 한국의 매운맛이 더 이채롭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니스 푸드 앤드 데코'의 강홍준 대표는 "중남미 등지에선 사실 우리나라 드라마의 인지도나 K-pop의 인기에 기대어 한식이 알려졌지만, 북유럽에선 오히려 한식 고유의 맛과 식재료의 매력이 어필한 것 같다"고 평했다.
북유럽에서 한식이 열풍으로까지 번지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김희욱씨는 "현지인들이 한식을 직접 만들어 보고 시식할 수 있는 기회를 지금보다 늘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