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판 없어도 당황하지 말 것
가격 묻는 건 실례 아냐, 취향도 정확하게 설명
바마다 드레스코드 등 나름의 규칙 있어
위스키&칵테일 바의 문을 열고 들어서기까지는 꽤 많은 장애물이 존재한다. 너무 비싸진 않을까? 괜히 젠체하는 사람들만 가는 곳이 아닐까? 덥석 들어갔다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건 아닐까?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건 아닐까?
이런 불안함은 사실 바를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씩은 겪는다. 적어도 한국에서 바는 아직 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문화인 것만은 확실하다. 소주에 삼겹살을 마시는 것보다는 확실히 돈이 많이 들고, 편하게 이를 쑤시고 큰 소리로 이야기하기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화가 몇몇 사람만 향유하는 폐쇄적인 문화라는 뜻은 전혀 아니다. 천천히 이해하고 제대로 즐긴다면 그 어느 때보다 나의 시간을 즐겁고 향기롭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진입 장벽의 허들을 좀 더 쉽게 넘을 수 있게 몇 가지 지침을 준비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바의 ‘진상 손님’이 되어 있지 않도록, 바 초보자들이 한번쯤 생각해보길 권하는 몇 가지 사항도 추가했다.
1 “가격이 얼마죠?” 당당하게 물어라
바를 처음 찾는 사람들이 당황하는 순간은 크게 두 가지다. 메뉴판을 펼쳤는데 뭐가 뭔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을때, 그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메뉴판을 아예 갖다주지 않을 때다. 요즘 바에서는 메뉴판이 있지만, 큰 역할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메뉴판의 위스키 혹은 칵테일 이름만 봐서는 알 수 있는 게 너무 희박해, 아예 메뉴판을 만들지 않는 업장도 꽤 있다.
여기서 손님이 맞닥뜨리는 문제가 바로 ‘가격’이다. 가격이 궁금하면 정확하고 당당하게 바텐더에게 바로 물어보자. 손님이 가격을 궁금해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뿐더러, 바처럼 화려하고 근사한 곳일지라도 가격을 묻는 일은 내가 초라해지는 일이 절대 아니다. 이를테면 ‘웰컴 푸드’가 나왔을 때 궁금하면 “이건 돈 내는 건가요?”라고 정확하게 물어보자. 이 질문에 피식 웃을 바텐더는 하늘 아래 없다.
2 "오늘은 좀 가벼운 칵테일이 마시고 싶어요" 아리송한 주문은 사양
메뉴판이 없는 곳이 많다보니, 바텐더에게 직접 어떤 술을 먹고 싶다는 의사표현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땐 최대한 자세하고 명확하게 자신의 취향을 전달한다. 이를테면 평소 탄산이 강한 음료를 좋아한다거나, 과일 향이 강한 것을 즐긴다거나, 신맛이 강렬한 술을 좋아한다거나, 알코올 도수가 세고 달콤하지 않은 것을 마시고 싶다는 식으로 칵테일 스타일을 규정할 수 있는 취향으로 설명한다.
단순히 “오늘은 좀 가벼운 칵테일이 마시고 싶어요”라고 두루뭉술, 아리송하게 이야기해놓고 바텐더에게 내 취향을 맞춰보라는 식의 태도라면 곤란하다. 물론 한 군데 바를 줄기차게 다니고, 어느 바텐더에게 너댓번 이상 주문을 해본 경우는 바텐더가 자신의 취향을 가늠해주길 바랄 수 있다. 하지만 점집에 간 것도 아닌데, 바에 처음 가면서 ‘내 취향을 헤아려 달라’고 하는 건....
3 '술 경험'으로 바텐더를 이기려들지 마라
간혹 어설픈 정보로 바텐더 앞에서 주름 잡다 집에 돌아가 ‘이불킥’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위스키는 ‘글렌’이 제일 좋은 거 아닌가? 글렌이 제일 맛있지.” 싱글 몰트위스키 중에선 ‘글렌’으로 시작하는 위스키가 너무 많다. 이런 식으로 어설픈 잘난 체 좀 하려다 바텐더가 어쩔 수 없이 오류를 바로 잡아주면 괜히 화를 빽 내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바텐더는 서비스맨이지만, 등 뒤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술 하나하나를 공부한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들을 믿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건 바를 이용하는 기본중의 기본이다. 그러니 제발 손님이면서 바텐더를 ‘술 경험’으로 이기려는 생각은 하지 말자. 바텐더에게 난데 없이 반말을 하는 사람들은 이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반증일지도....
4 바에서 돈 많이 썼다고 잘난체 말라
바는 손님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는 것을 최대 목표로 한다. 근사하고 화려한 분위기 속에서 정성들여 만든 칵테일 한잔을 마시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간혹 이 특별한 기분을 잘못 받아들여, 내가 세상 위에 군림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트러블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바에서 돈을 많이 썼다고, 내가 저절로 고급스러운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5 바의 규칙을 존중하라
요즘 핫한 바라고 해서, 소문난 바텐더가 있는 바라고 해서 모두 나한테 잘 맞는 건 아니다. 어떤 바는 음악이 전혀 내 스타일이 아닌 경우도 있고, 어떤 바는 유독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술이 없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왜 내가 찾는 위스키는 없어요?”라든가, “여기 음악 좀 바꿔주세요.”라고 말하는 건 진상 손님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각각의 바는 콘셉트가 명확하다. 흥겨운 음악이 흐르는 라운지 바도 있고, 위스키보단 칵테일에 집중하는 바도 있다. 손님은 그 바의 차이를 인식하고 인정하고 자신에게 잘 맞는 곳으로 찾아가면 된다. 요즘 한국에서도 다양한 스타일의 바가 등장하고 있으니 취향 맞추는 일이 크게 어렵진 않다. 콘셉트만큼 바의 규칙도 제각각 명확하다. 커버차지(자리값)을 받는 곳도 있고, 4명 이상 몰려갈 수 없는 곳도 있고, 드레스코드에 제한을 두는 곳도 있다. 안 맞으면 안 가면 된다. 그 규칙이 좋아서 가는 손님들도 분명히 있다.
6 기준점이 되는 클래식 칵테일을 골라보라
처음 바를 찾기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바를 가건 상관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클래식 칵테일 하나를 정해 그걸 매번 주문해보길 권한다. 이를테면 칵테일 마티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바를 바꿔 갈 때마다 마티니를 주문해본다. 조금씩 달라지는 맛에 그 바의 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고, 자신의 입맛의 영점도 잡을 수 있다.
◆ 손기은은 남성 라이프스타일 월간지 ‘GQ KOREA’에서 음식과 술을 담당하는 피처 에디터로 9년 째 일하고 있다. 이제 막 문을 연 레스토랑의 셰프부터 재야의 술꾼과 재래시장의 할머니까지 모두 취재 대상으로 삼는다. 특히 요즘은 제대로 만든 칵테일 한 잔을 즐기기 위해 바와 바를 넘나드는 중이다. 바람이 불면 술을 마신다. 하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