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7월 17일 오전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제헌절 기념식 도중 일부 참석자들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는 소동이 빚어졌다. 서울시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을 때 무대 오른쪽에서 객석 앞으로 큰 쥐가 한 마리 뛰어나온 것이다. 이 해프닝은 '시민회관 기념식에 쥐 소동'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됐다(경향신문 1969년 7월 17일 자). 행사장의 수백 인파도 겁내지 않을 정도로 그 시절 쥐들은 활개를 쳤다. 1979년엔 김포국제공항 심장부인 8층 관제탑에까지 쥐가 들끓자 공항 측이 통신시설 손상 위험을 막으려고 긴급 소탕에 나선 적도 있다.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 쥐가 얼마나 극성을 부렸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1972년 3월 25일의‘전국 쥐잡기 운동’을 알리는 홍보탑. 쥐약 놓을 날짜와 시간을 알리기 위해 거리 한복판에 3층 건물 높이로 세웠다.

1970년 농림부가 추산한 국내 쥐는 9000만 마리나 됐다. 당시 총인구(3220만명)의 3배에 육박했다. 한 집 평균 18마리꼴이었다. 날뛰는 쥐에 맞서 정부는 거의 전쟁을 벌였다. 삼천만이 한날한시에 쥐약을 놓자는 '전국 쥐잡기 운동'이 1970년 1월 26일 오후 6시에 처음 시작됐다. 쥐떼와의 전쟁은 공교롭게도 쥐띠 해였던 1972년 가장 치열하게 전개됐다. 정부는 그해 3월 25일의 쥐잡기 운동을 통해 4728만6027마리를 잡았다고 발표했다. 잡은 쥐의 꼬리를 제출받아 집계한 숫자다. 제10대 국회의원총선거가 있었던 1978년, 정부는 하필이면 투표일(12월 12일) 직전인 12월 8일을 쥐잡기 D데이로 잡았다. 전국 통·반장들이 쥐약을 나눠준다며 집집마다 방문하자 야당은 "쥐 잡는 약을 나눠준 거냐, 야당 잡는 약을 주는 거냐"는 식으로 비판했다.

'쥐잡기 운동' 시절은 7080세대들에겐 학교에 숙제처럼 제출했던 쥐꼬리의 징그러운 추억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쥐떼 때문에 재미를 봤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엔 1972년 10월 출범한 '한국 쥐잡기운동본부'가 있다. 전문교육을 받은 1800명이 활약한 이 특공대는 서울시 지원까지 받아가며 쥐 섬멸의 최전선에서 맹활약했다. 대형 매장 등으로부터 요청도 잇따라 수익이 짭짤했다. 현장의 먼지 채취로 쥐의 동선부터 파악해 쥐약을 놓는 등 '프로 킬러'의 실력을 발휘했다. 남대문 지하상가에서 연 '쥐잡기 시범' 땐 하룻밤 새 653마리를 잡아 상인들 혀를 내두르게 했다. 쥐가죽은 모피회사에 팔았으니 '꿩 먹고 알 먹고'였다.

또 하나 재미 본 곳은 방역 회사였다. 쥐떼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1976년 8월 '세스코'의 전신인 '전우방제'가 설립돼 3500곳의 '쥐잡기 거래처'를 갖고 있었다. 1970년대 청와대에서도 들끓는 쥐를 잡기 위해 경비원들이 공기총까지 들었다가 결국 이 회사에 도움을 청했다고 전순표 사장은 밝히기도 했다.

정부가 주도한 쥐잡기 운동은 1980년대 후반까지 계속됐다. 20년 가까이 총력전을 펼치면서 쥐의 의심 많은 성격을 공략하는 투약법도 개발했고, '저녁에 먹이를 못 먹은 쥐는 새벽 3~5시쯤 먹이를 찾는다'는 등의 습성까지 알아내 일망타진의 비법을 찾아냈다.

최근 프랑스 파리가 들끓는 쥐 때문에 도시 이미지가 불결해지고 관광객이 5% 이상 급감하자 쥐떼와의 전쟁을 선포했다고 한다. 우리 네티즌들은 "쥐잡기 특효인 한국산 끈끈이 좀 보내 줘라"는 댓글도 달았다. 끈끈이 정도가 아니라 관민이 하나 되어 섬멸작전을 벌였던 우리의 노하우를 전해 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